오래전 읽은 책이 생각납니다. '대화 예절'에 관한 글이었어요. 어려운 상대, 손윗사람, 고객 등을 대할 때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고 미간 또는 인중을 바라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서 선생님과 어른의 권위에 한껏 눌려 있던 저는 그 말이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면 왠지 대드는 것 같잖아?'라고 생각했지요.
졸업을 앞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무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에 가면 선배들하고 눈이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일진 언니들이랑 잘못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뭘 봐? 눈 깔아."라고 하면서 학교 옥상으로 불러낸다는 식의 얘기였지요. 지금 이렇게 글로 쓰다 보니 좀 많이 웃기긴 한데, 실제로 많은 시비와 싸움이 이 '아니꼬운 눈빛'에서부터 시작되는 건 맞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물론 순한 눈으로 그냥 멍하니 가다가 0.5초쯤 마주친 것 가지고 뭐라 할 선배들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마냥 무서웠던 저는 인상파 언니오빠들 곁을 지나갈 때는 나름 열심히 눈을 '깔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야단맞을 때, 반 단체로 꾸지람을 듣고 있을 때 만약 저 혼자 고개를 들고 선생님과 눈을 마주쳤다면 어땠을까요? 어이쿠, 아마 바로 "너 나와."하고 불려 나갔을 겁니다.
이런 학창 시절을 보내서일까요, 그땐 그런 책의 문구가 전혀 낯설지 않았어요. 아직 판단력도 미숙한 나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꿈틀꿈틀 들기 시작했어요. 사실 학창 시절에도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선생님들과 대화할 때는 어렵지 않게 눈을 마주치곤 했거든요. 엄마한테 혼이 날 때도 그랬지요. 물론 나름의 이유로 혼나는 게 억울해서 너무 노려보듯 쳐다보다가 등짝 한 대 더 맞기도 했지만, '억압적이지 않은', '인격적인 상호 관계'에서는 이 눈맞춤 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직장인이 되어 1:1로 상사를 대할 때도 전 당당히 눈을 바라봤어요. 다른 곳을 보면서는 오히려 영 집중이 안 되더라고요. 그렇지 않나요? 내가 얘기하는데 상대방이 흐린 눈으로 나의 인중을 그윽하게 바라본다든가, 흘끔흘끔 눈치 보듯 미간이나 콧등쯤을 스쳐 본다든가 하면요. 내 얼굴에 뭐 묻었나, 하게 되지요. 또는 이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 나와의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구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수많은 화법서, 지침서 등에는 아직도 그렇게 나와 있더라고요. "눈을 맞추기 부담스러운 때에는 넥타이 부근 또는 눈과 눈 사이를 바라보면 도움이 된다."라고요.
이건 1 대 다수의 보고나 발표 현장에서 더 많이 거론되는 떨림 해결책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긴 해요. 50개, 100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는 회의실에서 혼자 말을 해야 할 때, 너무 긴장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앞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눈을 맞추지 않고 내가 준비한 말만 쭉 늘어놓는 겁니다. 와, 어때요? 괜찮은 방법일까요? 제 생각엔 아주 잠깐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날의 그 발표는 어떻게든 넘어가겠지요. 중도 포기하지 않고요.
하지만 다음은요? 그리고 그날의 당신의 발표는 몇 점일까요?
물론 회사에서의 보고나 발표에 그날그날 점수를 매기고, 너무 빠듯하게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발표가 내 인생 마지막 발표는 아니잖아요. 우리는 오늘을 거쳐 내일로, 미래로 계속 나아갈 거니까요. 완벽하지 않더라도 조금씩 발전해서 결국은 여러 명 앞에서도 편안히 내가 준비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발표를 하는 게 최종 목표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하루하루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 봐야겠지요. 진득하게 눈을 맞추면서요.
대화할 때, 발표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정성껏 바라봅시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정성껏이요. 멍한 눈은 상대도 금방 알아차립니다.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짜 대화를 하고 있는지, 그저 저너머 어딘가를 보면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혼자서 말하는 가짜 대화를 하고 있는지를요.
화법 책들을 살펴보면 다수의 청중을 대할 때의 시선관리 팁으로 '리본을 그리면서 봐라', '골고루 봐라', 등등 여러 해결책을 제시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넥타이나 미간을 볼 것을 추천하지요. 안됩니다. 반드시 눈을 바라보세요. 한 사람 당 3~4초 정도면 적당합니다. 또는 지금 하고 있는 말의 문장이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한 문장 당 한 사람의 눈을 바라본다 생각해도 좋아요.
혹시 야단맞을 일이 있더라도 눈을 피하진 마세요. 뚫어져라 계속 보라는 게 아닙니다. 마주칠 땐 확실하게 마주치라는 겁니다. 눈을 계속 피하고, 흘끗흘끗 쳐다보고, 옆으로 돌리거나 상사의 인중을 멍하게 바라보지 마세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도 한 번씩 눈을 맞추고 진심 어린 눈빛을 보여주면 좋습니다.
대화는 공감과 전달이고, 발표는 곧 대화입니다. 공감과 전달, 대화에 눈맞춤이 빠져서는 안 되겠지요.
쉬운 듯 어려운 듯, 의식하면 할수록 어려운 시선 관리.
어느 정도 의식하고 노력해 본 후에는 이 글을 싹 잊어주세요. 자연스럽게, 의도하지 않아도 편안한 눈빛으로 말하는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