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마흔, 나를 주눅 들게 하는 나이

40대가 슬퍼지는 여섯 가지 이유

두 달 만이다. 생각보다 오래되진 않았네. 체감으로는 거의 다섯 달 정도는 글쓰기를 쉰 것 같은데, 고맙게도 날짜는 이런 면에선 내 편을 들어준다. 쭈뼛거리며 브런치 로그인을 했다. 내가 어느 브라우저로 글을 썼더라. 이것마저 낯설게 만든 길었던 두 달. 어쨌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마치 어제도 쓰고 오늘 또 쓰는 것처럼 오랜만의 글쓰기를 해보려 한다. 누가 알 게 뭐야. 남들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니까? 문제는 늘 내 안에 있었다.


춤추는 여인. 나도 생각없이 춤추고 싶다. but, 이 여인은 과연 생각이 없을까? ©픽사베이






아무리 '올해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만 나이가 시작된다, 글로벌 시대에 당연히 만 나이로 봐야지'라고들 해도 나는 토종 한국인이긴 한가보다. 태어난 지 정확히 따지자면 만으로 해서 몇 개월 덧붙여야 진짜 나이. 그렇게 치면 나는 39년 1개월이라 해야 정확하다. (이렇게 계산해 보니 아직 서른아홉 초입 같아서 기분이 좀 좋아진다) 하지만 '한국식 나이'로는 생일이 지나면 더하기 1을 해서 그냥 마흔. 


1984년생은 싹 다 올해 그냥 40살인 거다.

스무 살이 될 때도, 서른이 될 때도 몰랐다. 나이가 뭐가 중요해, 그냥 자연스럽게 생각해- 나만 늙는 거 아니잖아? 라며 호기를 부렸다. 원체 흘러가는 대로 내키는 대로 살아온 삶이라 그런가. 아, 이것도 계획적 인간이고 아니고 가 원인이었을 수 있겠다. 크게 고민하지 않은 것.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하지만 마흔이 된 지금 나는 예전 같지 않다. 괜스레 불안하고, 조급해지고, 때론 이제 중년의 나이라니- 하는 요상한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동안 괜찮다가 말이야.


이유 1. MBTI가 바뀌었다.


결혼 이후 내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 몸만 간수하면 되던 삶에서 이젠 남편, 그리고 두 아이를 늘 함께 생각해야만 하는 것으로. 때 되면 먹고, 자고 일어나고 학교 가고 졸업하고 취직하던 그냥 흐름에 맡기던 인생이었다. 운 좋게 적당한 때에 취직을 했고, 적당하게 남자를 만나 적당한 나이에(그 당시로서는) 결혼을 했다. 남들 다 하든 아이도 낳고 생각 없이 행복했다. 그때그때 주변의 도움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정보력으로 보통의 육아를 했고, 어느새 아이들 모두 초등학생. 마흔 살의 학부형이 되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결혼 10주년을 맞이했고 역시 아무 준비 없이 어영부영 지나갔다. 모든 게 장기 계획 없이, 단기 계획들로 채워진 나의 장기 인생이었다. 하지만 근 몇 년 사이,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왠지 모를 조급함이 생겨났다. 뭔가 계획 하에 이루어 내야 할 것 같은 불안함. 성향은 아직 P인데 J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해야 하나.


MBTI에서의 P는 인식형(Perceiving), J는 판단형(Judging)이다. 다른 말로 하면 P는 충동형, J는 계획형.

2년 전쯤 해본 나의 MBTI 진단 결과는 ENFP. 굉장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자유로운 인간형이었다. 하고 싶은 건 꼭 하고야 말고, 싫은 건 안 하고. 단, 계획은 없었다. 노 계획 but 추진력 짱.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럴까? 귀찮음에 다시 검사해 보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MBTI는 내가 스스로 진단하는 것. 안 해봐도 뻔하다. 물론 F와 P적인 성향은 많이 남아 있으니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 안의 퍼센티지는 극명하게 변했을 것 같다. 무턱대고 생각나면 시작하던 것에서 점점 계획하는 성향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40년쯤 살고 보니 이제야 내 인생의 그래프가 그림처럼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될 대로 되는 것을 선호했던 지난날에 아쉬움이 커진다. 늦지 않았다 세뇌하며 자꾸 계획을 세워보다 보니 MBTI도 변해간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예전보다 진도는 느려진 게 사실이다. 어쩔 수 없는 부작용으론 삶에 조급함이 +1 되었다는 것. 늘 뭔가에 쫓기는 것 같고, 항상 마음이 바쁘고,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이제 시작이라 그런 거겠지. P가 J 되기 어디 쉬운 건 줄 알았나. 


그래서 말이지. 언젠가 여기에 여유까지 갖춘다면 그땐, 진정한 불혹이 되는 건가, 싶다.


이유 2. 거울 속 내 얼굴에서 변화가 느껴진다.


인스타그램 속 #젊줌마 라는 태그를 떼어냈다.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당당히 사용하던 그 태그가 이젠 민망스러운 세 글자가 되었다. 몇 년째 쓰고 있지 않지만 최근 어느 기사에서 이 단어를 보았고, 오랜만에 내가 예전에 이걸 태그로 사용한 때가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정말 그랬다. 나는 젊은(때론 예쁜) 아줌마였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앳된 얼굴을 하고 유모차를 밀던 여리한 새댁은 목소리 크고 툭하면 욱 하는 초등 아들 둘 엄마가 되었다. 거울 속 내 모습에선 팔자 주름이 깊어지고 볼살은 미세하게 쳐지기 시작했으며 안 그래도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더 빠지는 건지 정수리가 갈수록 휑해진다. 아니 벌써 이러면 어쩌자는 건가. 물론 남들에겐 이렇게 자세하고 세밀한 변화는 보이지 않겠지. 누가 나를 그렇게 자세히 보겠어. 다만 내 몸의 주인은 나, 내 눈에 이렇게 보이니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젠 관리를 더 해야 하는구나 싶고, 그 흔한 아이크림 하나 챙겨 바르지 않던 나를 조금씩 채근하게 된다. 이때 관리 안 하면 한방에 훅 간다는 인터넷 속 인생 선배들의 조언들이, 날 더 조급하게 만든다.


이유 3. 아이들이 커간다.


유모차 밀고 이유식 싸들고 다니던, 길 가면 '어머 귀여워라' 소리를 듣던 아이들이 어느새 초딩, 아니 요즘 말로는 '잼민이'들이 되었다. 어느새 함께 목욕을 하지 않고 툭하면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일상은 이미 오래. 아가 티를 벗은 지 오래인 큰 아이와 어린 티는 못 벗었지만 2학년 형님이 된 둘째를 보면 시간의 무색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아이들은 '성장'하지만 어른들은 '노화'한다. 빠르게 커가는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멈춘 어른은 얼핏 보면 얼굴과 몸과 키가 그대로인 듯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변화가 더 무서운 법. 노화는 계단식이라 했던가. 어느 날 문득 한껏 푸석해 보이는 내 얼굴과 삐걱거리는 관절 덕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유 4. 부모님이 늙어간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나이 드는구나 느끼지만, 몇 년 새 부쩍 흰머리가 많아진 우리 엄마 아빠를 보면 그 느낌이 더 크게 다가온다. 자주 보니 그냥은 알 수가 없고, 가끔 구글포토가 전해주는 반강제적 추억 감상 시간이 바로 반성의 시간이자 회개의 타이밍이다. 아니 몇 년 전만 해도 엄마가 이렇게 팽팽했다고? 아빠 머리숱이 왜 이리 많지. 심지어 머리 색이 까매! 연세가 좀 더 많으신 시부모님 사진을 봐도 그렇다. 헉 아버님 이땐 젊으셨네, 어머님도! 


온갖 어플로 또는 화장으로, 잔망스런 표정연기로 잘 나온 사진 위주로 남겨둔 내 모습은 사진에서는 크게 차이를 못 느끼지만, 그때그때 내가 몰래 또는 무심히 찍어둔 어른들의 사진은, 너무 자연스럽다 못해 때론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알려준다. 어떻게 찍어도 우리 엄마고 아빠여서 나는 좋지만, 세월 앞엔 우리 부모님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훅 하고 속이 쓰려온다. 내 마음속 부모님은 여전히 30대 때 그 모습 그대로인데, 모르는 사이 60대 70대가 되어 계신 걸 보면. 왠지 모를 슬픔과 함께 나도 그만큼 들어가고 있구나 자각하게 된다.


이유 5. 남의 성공과 현재의 내 모습이 비교된다.


아이들 낳고, 키우며 정신없이 육아하던 시기를 벗어나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초등맘이 되고 나니, 이제야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우물 안 개구리로만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갑자기 눈이 부시게 넓은 세상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부신 눈을 비비며 두리번거려 보니, 일단은 아무리 그래도 나와 비슷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일단 아이 엄마일 것, 그리고 아이의 나이가 기준이 될 것. 아이의 나이가 우리 아이보다 많으면 그 엄마까지도 (엄마의 나이와 관계없이) 선배님으로 보이고,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진다. 우선 우리 사회를 때로는 좀먹고 있는 무시무시한 SNS부터 들여다본다. 인스타그램 속, 또는 유튜브에서 부각되는 인물들은 이미 어느 정도 성공 궤도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 내 눈에 띄었을 것이고, 많은 팔로워와 구독자를 보유하고 집필에 강연에,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유형은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해도, 생각보다 많다. 방송까지 나가 전국적 유명세를 타는 인물이 아니어도 '어느 정도' 해당 분야에서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사실 성공이라는 것이 기준이 매우 모호해서, 보는 사람 판단 기준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예전엔 이런 세상을 바라보며 막연히 동경하는 어린 30대였다면, 이제는 그걸 나에게 대입해 본다. 욕망이 아주 없는 여자는 아니었나 보다. 나보다 몇 년 선배인 성공한 누구, 심지어 나보다 어린데도 이미 성공해 보이는 누구.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모두 성공의 이유가 있다. 다이어트하는 법을 알아도 따라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이 성공한 법을 아무리 풀어도 따라 하는 사람은 몇 안된다. 이런 현상들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이 머리를 메우고, 지금까지 해오지 않던 방식으로 내 생활을 바꿔가다 보니 나의 마흔엔 과부하가 걸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유 6. 더 이상 30대가 아닌 40대, 소속의 변화에 대한 부적응


나이가 뭐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숫자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도 무수히 들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연령대별로 가르는 상황이 아주 많다. 뉴스만 봐도 그렇다. 10대, 2~30대, 4~50대 중장년층. 이젠 어딜 가도 난 잘해야 30대 끝자락, 그냥 봐서는 40대로 들어간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예전보단 젊음이 길어졌다 하지만 괜히, 괜히! 더 이상 청년층이 아니라는 생각에 어색함이 돋는다. 남과 비교해서 나의 정체성을 찾을 일이 아닌데도 자꾸만 그런 바운더리를 의식하게 되고, 그나마 아직은 짱짱한 또래 장수 연예인들을 보며 때아닌 위안을 얻기도 하니. 쓰면서도 웃겨서 웃음이 나온다. 부끄럽지만 이게 내 진짜 마음의 소리가 아닌가. 


40대 초보 아줌마는 이렇게 나이 들어간다.






하나하나씩 이유를 나열하다 보니 스스로 지금의 내 현상에 대한 원인 분석이 되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낀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은, 좀 너무 부정적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 인간의 뇌는 아주 복잡해서 나의 성격을 단번에 규정지을 수도, 쉽게 판단할 수도 없다. 어제의 기분이 오늘의 기분이 아니며,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일 수 없다. 


요즘 들어 내 뇌의 변연계가 고장인 건지, 측좌핵이 문제인 건지. 어디서 본 <우울증 환자의 뇌>라는 포스터에서 본 내용 상당수가 꼭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뜨끔하기도 했다. 우울증까지 갈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의 뇌는 이렇게 복잡하고 민감해서, 이런 부위에서의 약간의 변화 만으로도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릴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 40대에 갓 진입한 아들 둘 굳센 아줌마에게도 이렇게 연약한 뇌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이런 여섯 가지 이유로(또는 더 많은 이유로) 주눅 드는 내 나이 마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적만 알게 아니라 나 자신도 좀 알아봐야겠다. 

올해는 그냥저냥 이렇게 자꾸만 내 모습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느껴보려 한다. 그러면 전쟁에서 이기듯,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는 나이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