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경 시조집 『심장을 두고 왔다』 (가히, 2025)
김휼
시의 하늘 아래서 시를 살아가는 박숙경 시인의 시조집 『심장을 두고 왔다』를 읽는다.
2015년 동리목월로 등단한 후 좋은 작품들로 주목을 받아 오던 박숙경 시인이 깊고 그윽한 첫 시조집을 가히 시선 014번으로 출간하였다. 생각이 막힐 때 숨구멍을 찾듯 시조를 통해 숨을 돌리곤 했다는 시인, 2025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가 당선된 것은 하 많은 들숨과 날숨이 쌓인 결과물이리라 생각된다. 기존의 시조와는 달리 율격 안에서 자유롭게 사유를 펼쳐가는 작품들은 따뜻한 감각적 언어로 길 위에서 마주한 작은 존재들의 아픔을 품어 안고 있다.
시간을 어디에다 쓰는가는 그 사람을 말해주는 척도가 된다. 시조집을 받아 들고 목차를 읽어갈 뿐이었는데 시를 찾아 길 위를 걸어 다닌 시인의 고된 여정이 보여왔다. 제목 제목에 많은 시간 시를 찾아 헤매고 다닌 흔적이 보였다. 한 조각 빛나는 사금이 있는 광맥을 찾아내려고 사력을 다하는 광부처럼 한 줄 시가 오는 길목을 찾아 시의 시간을 헤매었을 고된 여정이 편 편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숨겨진 한 줄 문장을 찾아내고자 순천만으로, 감은사지로, 애월의 바닷가를 너머 닿지 못해 발만 구르는 그저 아득한 그 먼 곳으로, 바람이 되고 파도가 되어 시인은 흐르고 머물며 부딪힌다.
시인은 평범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평범한 그 공간을 특별한 '장소'로 만들어 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시선이 머물다 간 곳에 서사가 더해지길 소망하고 숨결이 보태지길 소망한다. 그 숨결로 인해 마른 뼈가 살아나듯 창조적 생명이 숨 쉬게 되길 소망한다. 찾아간 곳에서 돌아와 기억을 되감아 보는 시인은 누군가의 버려진 과거가 있는 공간에 정물로 걸려 있는 한 폭의 그림을 소환하여 숨을 불어 넣기도 한다. 스며든 숨결은 우리의 감각 속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고 급기야 손을 잡아끌듯 거울 속 같은 그곳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첫 페이지에 나오는 시가 그것이다.
세상이라는 곳 어디 바람만 있겠어요
세상이라는 곳 어디 눈보라만 있겠어요
눈 덮인 황량한 길을
나부끼는 사람아
누구는 그림처럼 살고 갔다고 하죠
누구는 부평초처럼 떠돌았다고 하죠
오래전 허공에 그린 생을
몰래 꺼내 읽습니다
아무리 몰라줘도 알아주지 않아도
뚜벅뚜벅 걸어간 움푹 패인 발자국
요약된 파란만장의 삶
행간을 더듬는 밤
『 풍설야귀인 ㅡ최북 崔北을 생각하며 』전문
‘풍설야귀인’은 조선 후기의 화가 최북의 작품으로 당나라 문인 유장경의 시를 옮긴 그림이다. 나무가 휘청일 만큼 겨울바람 세찬 어느 날, 폭풍 한설 몰아치는 어두운 밤에 어딘가로 길을 가는 그림 속 사람은 화가 본인을 투영한 작품으로 보인다. 49세의 나이로 짧은 일생을 마친 최북은 뛰어난 재주와 더불어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한 일화엔 어떤 어쭙잖은 양반이 그에게 그림을 요청하였다가 얻지 못하여 협박하려 하자 자의식이 강했던 그는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고 자기 손으로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했다는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기이한 성격을 가졌는지를 알려주는 예이기도 하다.
그의 기이한 성격과는 달리 최북은 그림에 대한 자존감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시대 회화사에 황금기를 맞이하는 시대였다. 당시 화가들은 중국의 화풍을 따라 우리나라에는 없는 산새를 화폭에 담고 있었다. 너도나도 깎아지를 듯 뾰족뾰족한 산봉우리, 계곡을 급히 흘러내리는 폭포가 담긴 산수화를 그렸는데 최북은 조선의 산과 계곡을 직접 찾아다니며 산천을 화폭에 담았다. 시가 오는 지점을 찾아 여러 갈래의 길 위를 헤맨 시인처럼 최북은 조선 산천의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여러 곳을 유람하였고 덕분에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당시의 우리 산천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인은 길을 걷다 걸음이 닿은 그곳에서 파란만장했던 최북의 삶을 만나게 된다. 그림 속에서 오래전 불행하게 살다 간 그의 행간을 더듬는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 속 그를 내면으로 끌어들여 그림 속 그와 조우하는 순간이 시가 된 것이다. 한기가 느껴지는 겨울 밤길을 홀로 걸어가던 시인과 시의 행간에서 독자는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게 된다. 어루만지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시인의 시선은 외롭고 쓸쓸했을 생에 한줄기 위로로 스미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시각을 어디에 비춰보느냐에 따라 평범했던 공간은 특별한 장소가 되어 시를 만나게 한다는 것을 박숙경 시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맥을 같이 한 작품이 있는데 바로 ‘앙간비금도’이다.
빈손으로 서 있는 나무를 그렸어요
둥지를 두가 가는 새떼도 그렸고요
먼 기억 더듬다보면
심장부터 저려와요
노을 속 그 발자국 살며시 돼 밟으면
나는 또 내가 되어 사무치고 사무쳐서
한 자락 추억을 펼쳐
모정茅亭도 그립니다
눈물이 흘림체로 흩날려서 눈 못 떠도
꿈속의 한때를 꺼내 먼 산도 그렸어요
불문율, 그게 뭐라고
가을볕의 생生일진대
『앙간비금도』 전문
음악과 미술을 혹자는 이란성 쌍둥이라 말한다. 시와 그림도 그쯤 될 것 같다. 시가 글로 그린 그림이라면 그림은 생각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글이라 할 수 있겠다. ‘앙간비금도’는 날아가는 새를 우러러본다는 뜻의 그림으로 허난설헌이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에 여성이 이름을 떨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녀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어린 시절부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그녀의 삶은 고난을 겪게 된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예술적 재능을 억압당해야 했다. 더군다나 전염병으로 두 아이를 연달아 떠나보내고 친정 집안은 역적으로 몰리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다 27세 젊은 나이에 홀연 생을 마감하게 되는 허난설헌, ‘앙간비금도’는 현실의 불안과 부자유를 벗어나고 싶은 허난설헌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했던 추억은 불행의 구간을 건너는 힘이 되어 준다. 당시엔 그림에 여자아이를 그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림 속에 어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자유의 수단으로써의 상징인 새를 그려 놓고 고개를 들어 두 부녀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시대에 그녀가 바라던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허난설헌은 행복했던 유년 시절을 화폭에 담아내고 그것을 바라보며 힘든 시간을 견뎠을 것이다.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시인은 귀를 기울여 그림 속 어린 소녀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날개가 꺾여버린 소녀의 꿈을 더듬다 저릿하게 심장이 저려옴을 느꼈을 시인의 시린 독백이 가슴속 울림이 되어 맴돈다. ‘가을볕의 生생일진대...불문율, 그게 뭐라고’
그림 속 사내와 소녀에게 그리고 모전석탑과 휴에리 동백등에게 감정이입을 하던 시인의 시선이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로 향한다. 시를 찾아 길 위를 헤매이던 걸음을 멈춘 그녀는 어느 날 구겨진 가방을 세워 두고 뜨개질을 하고 있는 자신의 그림자에 시선이 박힌다.
맞은편 유리창 속 나 같은 여자 하나
구겨진 종이 가방 무릎 사이 세워놓고
안뜨기 바깥뜨기로
남은 오후 짜 늘이네
실마리 움켜잡고 내달리는 두 개의 손
바늘 끝 시선까지 한 코씩 엮어내면
상상을 더하지 않아도
이미 따뜻한 겨울
살다 보면 가끔씩 그럴 때 있기도 해
덜컹 덜컥 흔들리다 저절로 아귀 맞는
까무룩 졸다 깨보니
한 뼘이나 자란 오후
-『뜨개질하는 여자』 전문
시를 쓰는 일은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생명이 불어넣어진 글을 읽으며 독자는 그것과 함께 호흡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독자는 시를 읽다 같은 정서의 숨결을 느낄 때 알지 못하는 사이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시의 힘이다. 보편적으로 시는 자신의 삶에서 나오는 법이라서 따뜻한 사람에게선 자연히 따뜻한 시가 나오기 마련이다. 선뜻 뱉은 말 한마디가 마음에 걸려 잠을 설치기도 하고 무심코 되받아낸 한마디에 상대가 마음 다쳤을까 뒤척이는 마음이 따뜻하기 그지없다. 박숙경 시인의 시에는 무해함이 있다. 유려한 묘사 없이도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과 비사물들에게 따뜻한 숨결을 불어 넣어 날 선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보듬어 준다.
시를 좇던 길 위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시선을 돌려 만나게 된 그녀, 유리창에 비친 여자는 나일 수도 있고 나를 닮은 다른 여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연히 마주한 여인은 안뜨기와 바깥뜨기 등을 하며 짜 늘인 시간으로 하루를 엮어내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실마리를 두 손에 움켜잡고 누군가에게 따듯한 겨울을 나게 하려고 생의 무늬를 엮어내는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어렵사리 한 땀 한 땀 엮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완성을 이루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그때 얻는 짜릿한 희열은 뜨개질하는 사람이 맛보는 감정, 여인이 뜨개질을 놓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그녀의 시는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일상의 풍경들이 시인의 서정에 닿아 독자의 내면에 울림을 일으킨다.
시의 하늘 아래서 시의 길을 걷는 시인은 시 속의 여인처럼 하루를 짜 늘이듯 창조적 시선과 저만의 끈기로 그렇게 사유의 지평을 넓혀 갈 것이다. 시에 맞닿은 삶의 층위와 남겨진 변수의 나날을 촘촘하게 직조해 나갈 것이다.
서평 김휼. 2025 다층 가을호
#김휼시인 #박숙경시인# 너의밤으로갈까#심장을 두고왔다
한국기독공보신춘문예와 2017 열린시학으로 등단.
목포문학상 본상 수상, 제주 4.3 평화 문학상 수상
시집『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너의 밤으로 갈까』
사진 시집『말에서 멀어지는 순간』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