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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영 Oct 30. 2022

Pier 43 1/2

샌프란시스코 7

   오늘은 내가 아끼는 파란색 바지를 꺼내 입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나, 최대의 적을 만나러 갈 때의 마음가짐과 약간은 비슷한 마음으로 그 바지를 골랐다. 같던 곳을 다시 찾아가는 설렘과 그래도 한 번 가봤다는 이유로 자리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유난히 활기차게 아침 시간을 보냈다. 옷은 아끼는 걸로 꺼내 입고서는 감지 않은 머리에는 비니를 눌러쓰는 모순된 모습으로 외출 준비를 마쳤다. 5층 방에서 1층 로비는 계단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를 두고 계단을 이용하게 되는 여행지에서만 나오는 이 습관은 한국 돌아가서도 이어진다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텐데. 1층의 프런트 옆에는 블랙커피가 가득 들어있는 보온포트가 놓여있었고 옆에는 종이컵과 설탕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 생각은 없더라도 커피는 꼭 마시려고 일어나자마자 주방에 들려 커피 한 잔 챙겨서 다시 방으로 올라오곤 했었는데, 그 커피가 1층 프런트에도 준비돼있는 건 이 호스텔에 머문 지 삼일째가 되고서야 알았다. 우리가 체크인하기도 전부터 그 자리에 항상 준비됐던 커피인데, 오늘을 위해, 나를 위해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뿌듯하게 커피를 한 컵 따르고, 로비에 있는 스텝들이 건네는 “Have a nice day!” 응원 같은 인사를 받고 호스텔 밖으로 나왔다. 오늘 날씨는 어제 만큼이나 화창했지만 내 기분은 어제보다 두배는 더 화창했다.


  5년 반 전에 샌프란시스코를 지나가는 일정으로 왔었을 때, 4시간이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물렀던 피셔맨스 워프를 다녀왔다. 오늘은 마음먹고 그때보다 더 오래 있으려고 하루 종일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먹었던 푸드트럭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넓은 주차장과 대형 식당이 생겼다. 그 식당에서 따뜻한 클램차우더 한 그릇씩 든든하게 먹고 걷고 또 걸었다. 항구 앞쪽에 줄 서있는 매장들을 다 들어가 보고 구경하면서 관광지라 괜히 재밌는 소소한 시간을 보냈다. 샌프란시스코라는 단어가 쓰인 후드와 맨투맨, 금문교가 그려진 다양한 자석들 등 기념품샵도 다 들어가 보고, 군것질 가게도 들어가서 젤리 한 봉지씩 사서 나오기도 했다. 기념품샵 사이에 자리한 각종 카드와 엽서를 파는 가게에서는 한 시간 가까이 있었고 나올 때는 재치 있는 엽서를 한 움큼 사서 나왔다.


 이전에 왔을 때는 한여름이라 사람도 많았고 항구 쪽이라 바람이 많이 불어 머리가 다 헝클어진 채로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마냥 즐거워 그때 함께 온 사람들과 남긴 사진들을 보면 우린 머리카락이 다 휘날려진 채로 활짝 웃고 있다. 겨울에 다시 찾아온 피셔맨스 워프는 그때보다 사람도 없도 바람도 덜 불었다. 5년 반 사이에 여기도 많이 변했지만, 누구든 기억할 그때 그 장소를 배경으로 홀로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에 나 홀로 서 있는 텅 빈 거리는 그때 함께 했던 사람들을 한 둘씩 떠오르게 했다. 그때는 있고 지금은 없는 사람들. 그때의 사람들은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나로 완성시켜주는 사람들이었을 거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 많은 게 변하고 거짓말처럼 사라졌어도 이렇게 떠올릴 때면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거겠지. 이런 기억이 무슨 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기억과 마주하는 건 내가 아끼는 옷을 꺼내 입고 찾아오게 할 만큼 의미 있는 일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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