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불혹
40!!
40대의 시작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30대의 마무리라고 해야 하는 걸까?
여하튼 올해로 마흔이 되어 유달리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새롭다.
SNS만 잠시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어쩌면 개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요즘의 맨파워 바로미터인듯하다. 오늘의 나만 보아도 그렇다. 업무강도가 심해짐과 동시에 피도로가 통제되지 않는다. 업무시간은 늘어나고 나를 위한 여유는 줄어든다. 계획은 수정되고 아쉬움이 남는 하루의 연속이다. 나는 그런 일상의 회오리 속에 이리저리 얻어터지며 휘청거리는데 SNS 속 사람들은 꼿꼿이 자기 일을 해내며 매일을 쌓아가는 듯하다.
내가 이러는 동안 벌어지는 일은 또 있다.
내 아이들의 성장. 지금의 어려움이 힘든 것은 사실 이것 때문이다. 내 성장을 위해 아이들이 크는걸 잠시 멈춰주는 것이 아니기에 세종과 전주에서 반씩 생활하는 나로서는 의무감이 두배랄까. 집에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책임감은 있지만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엄마로서의 부족함.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직장의 눈치를 보며 한 시간 일찍 퇴근해야 하는 평일의 민망함은 모두 나의 의무의 부재로 인한 것인가 싶어 작아진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유체이탈 생각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내 이야기를 나에게 전한다. 마치 내 친구의 이야기를 전하듯 혼자서 앞뒤 상황을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나서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할래?’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일명 나와하는 상담이다. 내 상황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나에 대해서도 내가 가장 잘 아는 데다 누구한테 변명하듯 설명해봐야 결국 이 데이터들을 모아~모아서 내 맘대로 하더라는 통계치도 이 대화법에 반복하는데 한몫했다.
효과가 좋았다.
생각보다 나를 객관화할 수 있는 탁월한 대화법이었다. 어느 날인가 직장에서 무례한 상황을 맞은 나에게 멘붕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이도 경력도 한참이나 어린 직원에게 가르침을 당한 나는 속수무책으로 말도 안 되게 사과를 하고 말았다. 사과를 하고 나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고 나서 대화를 시작했다. 그때 나는 내가 스스로를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순간 사과를 한 것은 정말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그 직원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그 순간의 나를 꼭 안아주고 다음번에도 역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나를 토닥였다. 그러고 나서 누구도 줄 수 없는 편안함이 찾아왔다.
그사이 내 아이들은 기다리고 있다.
편하지 않은 내가 집으로 들어올 때에 불안정하고 초조해한다면 집안은 불편해진다. 나는 집에 들어올 때 깊은 물이고 싶다. 아이들에게 또 남편에게 나의 동요가 어떤 영향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현명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떨어져 지내보니 나는 사회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사회에서 역할을 하고 감정 쓰레기는 다시 분리수거해야 하는 역할을 가졌다. 사회에서 역할만 하느라 처리하지 못한 감정 쓰레기를 그대로 내 가정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거리가 필요한 것인가 보다. 가까운 거리는 나와의 거리만 유지하면 된다.
완벽하려고 했었던 나를 위로했다.
완벽하려고 하다 보니 가정과 직장생활의 양립은 없다고 버릇처럼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가정과 직장의 양립은 모두에게 있어왔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서 그것이 안된다고 말했지만 처음부터 그런 모습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무엇인가 일어났다면 나는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깊은 물이 되고 싶은 나로서의 모습은 이렇게 갖추어 물동이의 안을 깊이를 더해간다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