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손에 쥐어준 긴 나무 막대기
열 살 우리 아들은 일곱부터 연필을 잡고 글씨를 그렸다. 그림인지 글씨인지 모르지만 유치원에서 연필 잡는 연습을 시작하고부터 곧 잘 연필을 잡고 있었다. 그때는 그 연필을 잡고 있던 손만 봐도 안쓰러워 작고 통통한 손에서 연필을 꺼내어 짧은 손가락을 펴고 조물조물 주물러 주었다. 나는 언제 처음 연필을 잡았더라? 아득하다.
연필을 잡고 받아쓰기를 하던 나는 언니가 되고 싶었는지 글씨 모양도 바르지 못한 그 와중 심이 얇은 샤프펜슬을 주어 담아 필통에 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삐뚤빼뚤한 글씨를 써갔다. 그러다 샤프는 볼펜으로 볼펜은 중성펜으로 나날이 종류를 다양화해갔고 지금은 다시 연필로 회귀했다.
연필은 정성이다. 연필의 그것은 슥슥 지면을 가로지르며 전해지는 아날로그 감성이다. 연하게 진하게 깊게 얕게 비언어적 언어를 전달하려는 나의 또 다른 표정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연필 필기에는 어김없이 그 마음의 상처의 자상이 그대로 지면에 남겨진다. 기분이 좋은 날엔 꾹꾹 눌러쓴 글씨들 옆에 마침표마저 야무지다. 어디 마침표만인가? 브이 모양 하트에 별도 그려진다. 연필 어어야 한다. 그 생동감.
키가 작아진 연필에 의한 기록은 내 생활에 묘한 동시성도 느끼게 한다. 그의 짝꿍인 지우개도 마찬가지다. 지우개와 연필을 조금씩 닳게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오늘 할 일도 불현듯 마무리되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인지 써도 써도 같은 외모인 볼펜은 잃어버려도 서운함이 없다. 한데 어제까지 사용하던 어딘가 익숙해진 연필과 지우개가 사라지면 수많은 연필들 속에서도 이름을 부르듯 찾아댄다. 모른 척 종이들 사이에서 다시 나타나지만 찾기 전엔 지구 핵으로 빨려 들어간 듯 눈에 띄지 않아 그사이 마음이 냉큼 서운하다.
우리 아들도 열 살 먹고 형님이 되었는지 집에서 샤프펜슬 몇 개를 찾아내어 자기 필통에 쟁여본다. 역시 샤프펜슬의 입은 휘어버리고 며칠 후 쓰레기통에는 사냥꾼에서 쫓기는 한겨울 눈밭 고개를 처박은 꿩처럼 샤프는 고꾸라져 있다. 그 엄마의 그 아들인가? 나는 내 아들에게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싶다. 연필에서 샤프펜슬, 볼펜, 중성펜 그리고 다시 연필로 돌아가는 그 과정은 엄마에게도 사랑스러웠던 과정이었고 그것은 오랜 시간 겪게 될 기쁨이자 과정이다. 그것은 과정이자 곧 목표이니 아들 너도 어딜 돌아 어디로 가더라도 네 길을 찾아가고 그 모든 것을 네 예쁜 손에 느끼며 선택할 수 있길… 자고 있는 네 손을 잡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