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가스라이팅

가짜 휴식을 파훼하다

by 담단



'떠남'을 강요하는 사회의 전언


현대 사회에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을 넘어 하나의 신앙이다. 인스타그램의 정제된 사진들과 "떠나지 않는 자 유죄"라는 식의 문구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밖으로 내몬다. 나 역시 그 정교한 '여행 가스라이팅'의 충실한 피해자였다. 대학 시절 배낭여행 한번 못 가본 결핍은 여행을 곧 계급의 증명이자 자아 성취의 척도로 믿게 했다. 결혼 후 첫 여행을 위해 남편과 경차를 팔았을 때,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일종의 '생존 신고'였다. 명품 가방대신 여행지를 소비하며 나는 내가 꽤 세련된 휴식을 누린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커녕, 매번 여행지에서 깎여 나가는 체력과 여행 후의 공허함을 애써 외면하며 다음 여행이라는 여행후유증에 진통제를 처방할 뿐이었다.




보상심리가 만든 '한 달 살기'의 형벌


삶이 팍팍해질수록 보상의 강도는 높아져야만 했다. 둘째를 낳고 맞벌이의 피로가 극에 달했을 때, 나는 '발리 한 달 살기'라는 거대한 허상에 올라탔다. 당시 사회는 '제주도 한 달 살기', '유럽 한 달 살기'라는 열병에 걸려 있었고, 나 또한 그 열기 속에 나를 던져야만 비로소 일상의 보상을 완결 지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바쁜 업무를 억지로 매듭짓고 남편의 휴가를 종용해 떠난 길. "가족이 다 같이 가는데 당연히 행복하겠지"라는 자기 최면은 일종의 독단이었다. 하지만 우기의 발리는 축축하고 비쌌으며, 일에 찌든 우리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낯선 자극'이 아니라 '익숙한 정지'였다. '각주구검(刻舟求劍)', 강물에 칼을 빠뜨리고 배에 표시를 하는 어리석음처럼, 나는 엉뚱한 곳에서 휴식의 해답을 찾고 있었다.




낯선 낙원에서 마주한 아이들의 눈물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각자의 지옥을 견뎠다. 국제학교라는 도전은 다섯 살, 열 살 아이들에게는 가혹한 유배였다. 한국인 하나 없는 교실에서 울다 지쳐 돌아오는 막내와, 유일한 말동무를 잃고 고립된 첫째를 보며 나는 내가 설계한 휴식의 정체가 무엇인지 자문해야 했다. '타인의 천국'을 나의 것으로 복제하려 했던 욕심의 대가는 컸다. 아이들의 하교 후 지친 뒷모습과 우리 부부의 무기력한 방황은 한 달간의 긴 침묵으로 이어졌다. "누군가에겐 천국이라는데 왜 우리에겐 아닐까?"라는 질문조차 금기시되었던 그 시간. 집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발리에 대해 입을 닫았다. 그것은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가족 모두에 대한 정서적 가스라이팅이었음을 비로소 시인한 순간이었다.




고된 헌신 속에서 발견한 '휴식의 전이'


최근 3대 가족 9명이 함께 떠난 일본 여행은 나에게 결정적인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여행사 없이 9명의 일정과 식사를 조율하는 과정은 가혹한 노동에 가까웠다. 낯선 길 위에서 생길 변수를 통제하느라 밤마다 네 시간도 자지 못한 채 지도를 저장하고 예약 현황을 확인했다. 하지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낯선 여행지가 주는 감흥은 여전히 무(無)에 가까웠지만, 내가 짠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즐거워하는 친정엄마와 조카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지켜보는 나의 마음이 이토록 평온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낯선 풍경이 주는 자극보다 훨씬 강력한 '안정감'이었다. 가족을 위해 기꺼이 소진되는 시간은 아깝지 않은 추억으로 남았고, 나는 거기서 뜻밖의 발견을 했다. 나에게 휴식이란 '나를 어딘가로 옮겨놓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확인하는 정서적 확신'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낯선 곳의 경이로움보다 익숙한 이들의 편안한 표정이 내게는 더 큰 휴식의 모양으로 다가왔다.



무지의 지(知), 나만의 휴식을 재정의하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했다. 나는 이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나를 속여왔는지 안다. 여행이 곧 휴식이라는 세상의 공식은 나에게 '참'이 아니었다. 여행은 남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았던 열등감의 배출구였으며, 불안하고 나약했던 자아를 근사한 장소로 가리려 했던 분칠에 불과했다.


10년의 세월을 돌아와 내린 결론은 허무하기보다 오히려 숭고하다. 이제 나는 남들이 열광하는 '한 달 살기'나 '명소 탐방'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휴식은 정갈하게 정리된 집 거실에서, 혹은 가족들의 평온한 일상을 지켜보는 안락한 의자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행이라는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난 지금, 나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머무름'을 시작했다. 수수께끼는 풀렸고, 나의 영혼은 이제야 집으로 돌아와 깊은 숨을 내 쉬며 휴식 중이라는 것이 생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