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실패가 비전이 되기를

by 담단

요즘 나의 하루는 예비 중학생이 된 아들과 함께 흐른다. 사춘기의 초입에선 아이는 고집스럽고 다정하며, 철없고 성숙하다. 그 안에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와 ‘아직 품 안에 머무르고 싶은 아이’가 매일 전투를 벌인다.


올 봄 아이는 처음으로 기숙사 생활을 앞두고 있다. 부모의 품을 떠나 또래들과 어울리며 생활해야 하는 시간. 그래서일까, 나는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 조급함이 자라나고 있음을 느낀다. 아이가 낯선 환경 속에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을까, 선배들과 어색한 관계 속에서 위축되지 않을까, 혹은 시간 관리를 못 해 무력감을 느끼진 않을까.


어쩌면 나는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40대 중반이 된 나 역시 여전히 관계에 서툴고, 때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런 나의 시행착오 위에 아이의 시간을 덧그려보려 하니, 걱정이 두려움으로, 두려움이 조급함으로 변했다.


그 불안은 마치 걱정인형이 되어 아이를 감싸는 그림자 같다. 아이의 성장통을 내 불안이 대신 겪어주려 하지만, 정작 아이는 그 무게를 고스란히 삼키는 듯하다. 내가 두려움에 잠긴 밤일수록 아이가 더 무겁게 잠이 드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아이의 여정은 내 불안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질서를 찾아가는 탐험이라는 것을.


발달심리학에서는 사춘기 아이의 뇌를 ‘공사 중인 현장’에 비유한다.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는 이미 입주를 마쳤지만, 판단과 조절을 맡은 전두엽은 아직 골조를 세우는 중이다. 그러니 아이의 실수는 성격의 결함이 아니라 더 단단한 나를 짓기 위한 설계 변경의 과정이다.


내 아들은 서사와 이야기 구조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하루를 소설처럼 풀어내고, 감정과 상황을 인물의 서사로 연결한다. 그런데 나는 너무 쉽게 결론부터 알려주려 했다. "이건 틀렸으니 이렇게 해"라며 인생의 스포일러를 던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오늘 하루 중에 가장 마음이 쓰였던 장면은 뭐니?”

“이 상황을 실험이라 본다면, 네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는 무엇일까?”

“네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다음 장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그제야 아이의 얼굴에 작은 빛이 스며들었다. 평가받는 대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질문 하나가 아이의 사고 회로를 자극하고, 부모의 통제가 아닌 아이 자신의 동기를 불러일으켰다.


조벽 교수님의 강연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부모는 아이의 꿈을 응원하되, 실패를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

실패는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나침반을 만드는 과정이다. 아이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의 질서를 찾아갈 때, 비로소 ‘나라는 우주’가 완성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 불안이 그것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결국 내가 바꿔야 할 것은 아이의 행동이 아니라, 아이의 실패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나의 침묵이다.


이제 나는 아이의 앞길에 놓인 돌부리를 미리 치워주는 대신, 아이가 그 돌에 걸려 넘어졌을 때 곁에 앉아 흙을 털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가 그려나가는 선이 삐져나왔다고 해서 그 그림이 망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삐져나온 선이 새로운 무늬가 되어 그 아이의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든다.


아이의 첫 기숙사 겨울을 앞두고, 나는 내 조급함을 천천히 녹인다. 내가 걱정의 옷을 벗을 때, 아이는 비로소 자기 옷을 입는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비전이 자라는 시간이다.

나는 오늘부터 아들이 써 내려갈 그 위대한 서사의 다음 장을, 조용한 믿음으로 기다려보겠다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