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감는 선율
2월의 끝자락을 휘감았던 셀린 디온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지나간 자리, 그 뜨거웠던 열기가 서서히 식으며 말랑해진 공기 사이로 낯익은 멜로디가 스며든다. 3월, 만물이 소생하고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이 계절에 내가 꺼내 든 곡은 우타다 히카루(Utada Hikaru)의 'First Love'다.
2002년, 캠퍼스의 봄바람에 실려 온 목소리
이 노래가 세상에 나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1999년 발매된 이 곡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물결을 타고 한국의 대학가와 거리의 스피커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내가 02학번 새내기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이라는 낯선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해 3월에도 이 노래는 어디에나 있었다.
당시의 3월 교정은 묘했다. 겨울의 까칠한 잔재가 여전한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뺨을 스치는 바람에는 포근한 흙 내음과 이름 모를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그 이질적인 봄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주변 어디서든 어김없이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You are always gonna be my love…"로 시작되는 첫 구절은 설렘과 아련함이 뒤섞인 스무 살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고, 그래서 더 쓸쓸하면서도 반짝이던 2002년의 공기가 이 노래 한 곡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세대를 넘어 이어진 J-pop의 낭만
시간은 어느덧 20년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음악은 마법처럼 시간을 되감는다. 요즘 우리 집 거실에는 다시금 J-pop의 선율이 흐른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즐겨 듣는 음악이 공교롭게도 일본 음악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그룹 'Mrs. GREEN APPLE'의 청량하고 세련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묘하게도 내가 스무 살에 느꼈던 그 특유의 J-pop 감성과 맞닿아 있음을 느낀다.
아들이 'Mrs. GREEN APPLE'의 노래를 흥얼거릴 때마다, 나는 입술 끝까지 차오르는 'First Love'의 멜로디를 떠올리곤 했었다. 아들이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의 낭만이 훗날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알기에,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찡해진다. 음악의 힘이란 진정 이런 것일까. 2026년의 거실에서 2002년의 캠퍼스로 단숨에 나를 데려다 놓는 이 초자연적인 경험. 아들의 노래는 내게 20년의 세월을 한 번에 뛰어넘는 시간 여행의 티켓이 되어주었다.
설렘과 아련함 사이, 스무 살의 계절
봄이라는 계절은 잔인할 만큼 눈부시다. 고등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마주한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차가웠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동경과 설렘은 무엇보다 뜨거웠다. 우타다 히카루의 목소리에는 그런 양면성이 담겨 있다.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썼다고 믿기 힘든 깊은 슬픔과, 동시에 오직 그 나이대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함 말이다.
물론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 대지를 달구기 시작하는 후끈한 열기 속에서도 이 노래는 지치지 않고 울려 퍼졌다. 땀방울이 맺히는 이마 위로 흐르던 그 애절한 멜로디는,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과도 같았다. 3월만 되면 이 노래가 생각나는 이유는 단지 유명해서가 아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설프게 피어났던, 그래서 가장 많이 흔들렸던 2000년대 초반 그 계절의 온도가 이 곡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올해의 3월은 조금 더 특별하다. 복직을 준비하며 내실을 다지는 시간, 그리고 사춘기 아들과 음악으로 교감하는 시간. 20년 전의 내가 'First Love'를 들으며 막막한 미래를 꿈꿨다면, 지금의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지나온 시간을 긍정하고 현재의 나를 다독인다.
까칠하면서도 포근한 3월의 바람이 분다. 아들의 방에서 들려오는 활기찬 'Mrs. GREEN APPLE'의 노래 뒤로, 나는 나지막이 우타다 히카루의 가사를 읊어본다. 시간을 초월해 스무 살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는 지점, 그곳에 음악이 있다. 20년의 세월을 단숨에 가로지르는 이 신비로운 경험을 안고, 나는 다시금 힘차게 3월의 문을 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