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 아래서 피어난 이름들

길 위에서 가정으로, 작은 생명들의 긴 여정

by 할망

방파제에서 윤슬처럼 빛나던 두 어미의 아기 고양이들. 활짝 피기도 전에 져버린 두 생명은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별이 되었다. 그 별빛은 제주 남쪽, 임시보호처의 창문 너머에서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 아래, 그들의 형제 조천이와 숨비가 긴 치료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임시보호처에서 치료중인 숨비와 조천이


조천이의 작은 몸에서는 허피스와 기생충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곰팡이균이 발견되었다. 방파제의 습한 바위 틈에서 지낸 흔적이 몸에 남은 듯했다. 서둘러 격리했지만 균은 집 안 곳곳으로 퍼졌고, 보호자의 반려묘인 복실이와 복돌이, 그리고 보호자의 몸까지 아픔을 나누게 했다. 피가 맺히도록 긁고, 빠져나가는 털을 감내하며 그들은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뎌냈다. 멀리 육지에 있는 나는 장난감과 간식을 보내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마음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길에서 온 고양이의 곰팡이 균이 임시보호자의 반려묘에게 전염되었다.


“아픈 아이들을 보살피며 새 삶을 선물하고 싶어요.” 11년차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보호자의 첫마디였다. 그 손길이 아니었다면, 조천이와 바다는 지금의 온기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같이 안부를 기다리며,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마음을 그저 조용히 품고 있었다.


방파제의 고양이들에게는 여전히 누군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월정리의 책다방과 언니옷장 사장님들이 매일 아침 출근길마다 끼니를 챙겨주고 있었다. 맑음이와 또래 고양이 둘, 그리고 아기 하나씩을 잃은 두 어미는 이제 ‘고정 밥 손님’이 되었지만, 아기 고양이들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미가 마을 안쪽 어딘가에 아이들을 옮겨 숨겨두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은 담담히 사료를 챙겨 두었다. 고양이들이 자리에 있어야만 밥을 줄 수 있는 현실 속에서도, 작고 다정한 마음들이 하루하루 쌓여가고 있었다.

단체에서 약속한 급식소 설치와 중성화 지원은 아직 소식이 없었지만, 그 공백은 그렇게 누군가의 다정함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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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방파제 위, 작은 생명을 향한 따뜻한 손길이 놓이고 있다..


슬픔이 내려앉은 방파제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은 찾아왔다. 책다방 언니는 붉게 물든 새벽빛 아래, 습식 캔으로 만든 작고 다정한 2단 케이크를 고양이들에게 내어놓았다. 해가 막 떠오르는 고요한 시간, 언니의 마음은 바람을 타고 아이들에게 닿았다. 그 마음은 아침 공기를 데우는 조용한 위로이자, 연약한 생명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선물이었다.

방파제의 아침, 고양이들을 위한 따뜻한 크리스마스 선물


그날, 임시보호처에서도 작은 기적 같은 소식이 도착했다. 조천이의 피부병이 완치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보호자의 반려묘인 복실이 품에 안겨 평화롭게 잠든 사진 한 장이 도착한 것이다.

젖을 찾듯 복실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조천이를, 복실이는 조용히 품에 안고 있었다. 숨비는 여전히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마음을 열고 따뜻한 품에 기대어 잠드는 날이 올 거라 믿었다. 나는 그 감동을 품고 조천이와 숨비의 첫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입양 공지를 SNS에 올렸다. 진심이 닿기를, 누군가의 품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엄마 품이 그리운 아기 고양이, 임시보호처에서 맞는 조천이와 숨비의 첫 크리스마스


나는 다시 육지로 돌아와 직장을 다니며 입양 보낸 고양이들의 탁묘 약속을 지키느라 분주한 겨울을 보냈다. 아이들을 보낼 때마다 “집을 비우실 일이 생기면 꼭 연락 주세요. 입양 A/S로 제가 돌보러 갈게요.” 하고 웃으며 말했다. 고양이들이 낯선 환경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보호자의 걱정을 나누고 싶어 드린 말이기도 했지만, 그 말 안에는 나의 그리움도 고요히 깃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눈빛은 여전히 반짝이는지, 마음 한켠엔 늘 그들의 안부가 머물러 있었다.


그해의 마지막 날, 나는 세 해 전 구조해 입양 보냈던 꽃순이네 집에서 탁묘를 하며 새해를 맞았다. ‘우리 모두의 고양이’ 전시에서 발생한 수익금으로 방파제 고양이들을 위한 사료와 습식 캔을 준비해 보냈다. 작지만 따뜻한 마음 하나, 바닷바람을 타고 고양이들에게 가닿기를 바라며.

엄마 곁에서 시작된 꽃순이의 시간, 세 해를 돌아 다시 만난 눈빛


새해가 밝았지만, 아기들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들의 어미까지 자취를 감췄다. 아기들이 건강해지면 어미의 중성화 수술을 알아볼 계획이었는데, 사라진 것이다. 날씨가 부쩍 추워진 탓에 더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어긋난 탓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아기들의 흔적이 사라진 지 한 달여, 이제는 어미까지 보이지 않자 마음 한켠이 자꾸 시려왔다. 걱정이 쉬이 가시지 않아 짧은 일정이라도 시간을 내어 다시 방파제로 향하기로 했다. 조천이와 숨비를 만나고, 입양을 위한 사진과 영상도 남기고 싶었다.


한겨울의 방파제는 적막했다. 사람도, 발자국도 없는 길 위로 찬 바람만이 맴돌았다. 나는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아이들의 흔적을 찾았지만, 좀처럼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찰나, 멀리서 맑음이가 달려왔다. 어느덧 듬직한 청소년 고양이로 자란 맑음이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뒤이어 삼색 어미가 수컷 턱시도 고양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고, 또 다른 삼색이도 수컷 고양이와 나란히 걸어 나왔다. 카오스 어미는 끝내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 남은 암컷 고양이들만이라도 하루빨리 중성화 수술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짝을 지은 고양이들, 더 늦기 전에 중성화 수술이 필요할 때


애초에는 급식소를 먼저 설치해 고양이들이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든 뒤, 중성화를 순차적으로 시작할 계획이었다. 쥐약 사건이 있었던 마을이기에, 단체를 통해 주민들에게 고양이의 존재를 설명하고, 함께 살아갈 이유를 먼저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러 지역의 요청을 감당하느라, 이곳의 일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듯했고, 그 사이 고양이들은 짝을 지어 다니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위 틈에서 또다시 어린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때였다.

사랑에 빠진 두 고양이는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현실은 불안했다.


제주의 TNR(길고양이 중성화 사업)은 지역 특성상 포획틀도 제한적이었다. 같은 지역은 한 개만 대여 가능하다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오묘한 집사님께 상의드렸더니, 집사님은 익숙한 말투로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포획틀은 제가 따로 구해볼게요. 날만 괜찮으면 직접 가서 도울게요.”

그 다정한 말에 마음이 한결 놓였지만, 일정은 짧았고 날씨는 고르지 못했다. 내가 머무는 동안에는 중성화 작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

다시 일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방파제 고양이들에게 매일 사료를 챙겨주는 책다방과 언니옷장 사장님들이 말했다. “날씨가 잔잔해지는 날, 우리가 오묘한 집사님 도움을 받아 직접 해볼게요.” 그렇게 중성화는 잠시 미뤄졌고, 나는 조천이와 숨비를 만나기 위해 임시보호처로 향했다.


구조된 지 두 달 남짓, 아이들은 이제 제법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허피스와 곰팡이 피부병을 이겨낸 두 고양이는 어느새 또렷한 이목구비와 호기심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조천이는 먼저 나와 장난감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고, 겁 많던 숨비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금살금 다가와 함께 놀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보다는 놀이에 집중하는 모습은, 이곳이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는 뜻이었다.

그날 나는 조용히 아이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전하지 못한 많은 말들이, 이 작은 몸짓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기를.

어딘가 이 아이들을 기다려줄 따뜻한 품이 있기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부드럽기를 바랐다.

임시보호처에서 치료밥으며 건강해진 숨비와 조천이


그리고 봄을 닮은 어느 날, 그 바람은 조심스럽게 현실이 되었다.

치즈 조천이는 포도라는 이름을 얻고, 꽃집을 운영하는 열두 살 묘르신 고양이와 두 명의 어린이, 그리고 따뜻한 집사 부부의 가족이 되었다. 이제 그는 꽃내음 속에서 고양이 선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웃음소리가 흐르는 집에서 자라고 있다.

카오스 숨비는 복순이라는 이름으로, 임시보호처였던 고양이 잡화점 ‘게른‘의 사장님과 한 지붕 아래 가족이 되었다. 이미 두 마리 고양이와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온 사장님은, 유난히 조심스러웠던 숨비를 조용히 끌어안아 주었다. 낯선 세상에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던 아이였기에, 더욱 감사한 인연이었다.

입양을 축하하며 준비한 스크래처와 간식은 조심스레 포장되어 아이들의 새 보금자리로 향했다. 그 집에서, 그 품에서, 두 생명이 다시는 길 위로 돌아가지 않기를. 이별이 아닌 시작으로 이어진 인연들이 오래도록 반짝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몇 달 뒤, 복순이의 입양 가정에서 반가운 초대장이 도착했다. 보호자는 복순이가 태어났을 즈음으로 생일을 정하고, 첫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 사장님의 집 한켠에 꾸며진 작은 생일상에는 내가 그려 선물한 복순이의 그림이 담긴 축하 카드와 케이크가 놓였고, 형제 복실이와 복돌이도 함께 둘러앉아 조용히 축하해주었다.

그날의 복순이는 작고 단단한 가족의 중심에 있었다. 여전히 조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그 속엔 이제 따뜻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먼 바닷가 방파제에서 시작된 생이, 이렇게 누군가의 ‘소중한 하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방파제에서 건너온 생명, 이제는 가족의 중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