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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곤 May 16. 2024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길을 걷다 문득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몇 년을 보던 드라마의 다음 시즌도, 새로 출시된 음료수의 맛도, 내 미래도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싶은 것이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얼마 전 친구가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많이 생기면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냥 지금처럼 살 것 같다고 답했던 이유가 지금의 인생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그 돈으로도 하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약을 먹는다. 식사를 한다. 이를 닦는다. 그다음부터 막막하다. 방학을 앞두고 생활 계획표를 짜고 있는 교실 안에서 나만이 텅 빈 시계 그림을 보고 있다. 휴대폰 속에 있는 것들도 궁금하지 않아 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이 늘었다. 살고 싶지 않다는 감각을 외면하는 데에 모든 힘이 들어가 있어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졌다. 같은 일을 해도 남들보다 노력이 배로 필요하다. 노래를 끝까지 듣거나 동영상을 중간에 끄지 않는 일, 머리를 감고 말리는 일, 양질의 음식을 먹기 위해 직접 요리하는 일, 타인과 연락을 지속해 나가는 일. 남들은 당연하게 해내고 있는 행동들이 내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을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게다가 팔다리에는 모래주머니를 차고서.


 우울에는 순서가 있다. 가끔 몇 계단씩 건너뛰긴 할지언정 어렴풋이나마 정해진 단계가 있고 흐름이 있다. 목숨을 버린다는 마지막 종착지도 존재한다. 나아지는 데에는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 약을 먹고,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마음을 다잡고, 그다음엔? 뭘 해야 하는데? 나는 이미 짧지 않은 시간을 버렸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버려야 하는 걸까. 다음 병원 예약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유가 있어서 나타나는 증상이라면 해결해 보려는 시도 정도는 해 볼 텐데 그조차도 없으니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 창문 없는 방 안에 앉아 벽만 쳐다보고 있는 기분이다. 방은 점점 좁아진다. 자꾸만 작아지다가 결국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잠깐이나마 존재했다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내게 창문 없는 방이 존재하듯 모든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떠오르는 가까운 이들만 해도 각자의 방이 상상된다. 친구 A의 방에는 그 애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포스터라든가 앨범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고 B의 방에는 차마 치우지 못한 옷가지가 바닥이며 의자며 할 것 없이 널려있을 것이다. 잘 정돈되어있진 않겠지만 어쨌든 사람 사는 방처럼 느껴질 테다. 그러나 나는. 내 방에는. 그 무엇도 자리하고 있지 않다. 벽도 바닥도 천장도 흰색이라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흘린 눈물이 아래로 떨어지기에 내가 바로 앉아있긴 하다는 정도만 알 수가 있다. 방을 채우는 센스가 인생을 살아가는 센스일 수도 있겠다. 텅 빈 방을 추하지 않을 정도로 꾸미고 닦고 치워서 남을 초대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집에 초대받는다. 세상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방을 탐색하고 평가하고 합치며 돌아간다. 나와 같이 남을 초대할 수 없는 방에 살거나 어쩌다 초대받은 집에서조차 도망치고야 마는 사람의 세상만이 멈춰있다.


 궁금하다거나 무언갈 알고 싶단 욕망은 인간이 태초부터 간직해 온 아주 기본적인 본능이다. 우리는 궁금했기에 먹을 수 있는 풀과 없는 풀을 구분 지었고 계란 흰자를 천 번 저어 머랭을 만들어냈고 우주로 인공위성을 보냈다. 마주한 이의 속마음이 궁금해 언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는 분명 호기심이 아주 많은 축에 속했다. 식당에 가면 제일 낯선 메뉴를 시키는 게 당연했다. 개봉하기까지 한참 남은 영화의 뒷이야기를 찾아보는 데에 시간을 쏟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며 세상에 존재하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이야기를 머리에 넣느라 잔뜩 흥분한 채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즐거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이젠 궁금하지 않다. 누가 내 머리 뚜껑을 열어 호기심을 포함한 여러 버튼을 꺼 버린 것 같다.


 언젠가 내가 고장 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어디가 어떻게 고장 난 줄은 알고 있기에 적당한 때에 알맞은 부품만 찾는다면 충분히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치는 데 필요한 연장을 사러 가거나 방법을 배우러 가지는 못했다. 말 그대로 고장이 나 있으니까. 풀린 나사를 손에 쥐고 어떤 드라이버를 살지 고민하면서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흐른 지금은 고장이 난 게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기능-타인과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친밀해지기, 자신을 돌보기, 시간과 장소에 맞는 옷 입기 같은-따윈 없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고장이 난 거라면 한두 번 정도는 제대로 기능한 적이 있다는 소린데, 내 기억 속 모든 순간의 나는 스스로가 내린 명령을 멀쩡히 수행해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보통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관찰하고 또 짐작하곤 했다. 잠깐 흉내 내 보기도 했으나 내 몸이 정상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꾸만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듯 굴어 얼마 가지 않아 그만두게 되었다. 돌고래가 인류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도 과학적으로 따져본다면 제로가 아닐 텐데 오로지 내가 멀쩡해지는 것만이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당장 내일 할 일은 고사하고 이 글도 어떻게 끝내야 할지도 모르겠는 와중에 오 년 십 년 후의 미래가 그려질 리가 없다. 애를 써봐도 떠오르는 것은 재생이 끝난 비디오테이프처럼 검은 화면. 미래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상태에선 감히 상상하지 못할 뿐 언제 우울했냐는 듯 자랑스런 삶을 살고 있을 수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곧 잠에 든 후 일어나면 약을 먹고, 식사를 하고, 이를 닦겠다는 계획과 그 뒤에 찾아올 막막함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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