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율 May 15. 2024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아직은 노래가 아닌 어느 귀뚜라미의 울음

타전.


정신과 약을 이 년간 복용한 것을 끝으로 결국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득이라면 소득일까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 열에 아홉이 흡연자일 정도로 일이 힘든 직장들만 골라 다녔던 이십 대 초반에도 담배를 물 생각은 좀처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몸에 나쁘다는 걸 굳이 내 돈 내고 하는 건 무의미한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보니 뭐랄까. 그렇다면 내가 지난 이 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이부은 그 향정신성의약품들은 딱히 뭐가 다른가 싶어진 게 아니겠습니까. 의료인의 전문가적 지식 태클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어떻게든 흡연을 하고 싶어서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핑계라고 보시더라도 뭐 별 수 없지요. 그래도 어쨌거나 제게 중요한 건 일곱 알씩 하루에 두 번 먹던 그 많은 처방약들을 나름의 호전이라고 볼 만한 상태가 됐다는 판명 하에 이젠 완전히 끊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저는 불행하고 슬프고 서글프고 또 이따금씩 너무도 울고 싶어서 파르르르 손이 떨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정신과 약을 먹기엔. 제가 의사의 말에 따라 얌전하게 그 약들을 목구멍으로 넘기던 그 시간들은. 단지 너무도 크나큰 고통이었습니다.

     이상이 이 무뎌진 나이에 마침내 흡연자 대열에 합류한 한 애송이의 변변찮은 출사표입니다. 아니 고변입니다.

     무엇을 위해 이때까지 살아온 걸까요. 이제 저도 어느덧 일의자리 수에서 반올림을 하면 서른이 되는 연배에 접어들었습니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처음으로 좋아한 나이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이지 막연하게도 그러나 또 의연하게도 제가 이 육신을 가지고 또 이 영혼을 가지고 서른이 되는 일만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다고 어째서인지 그토록 지독하게 확신하곤 했습니다. 그 곱절의 나이가 되어 다시 돌이켜보면 참 우스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서른즈음에라는 그 노래를 더 잘 이해한 것은 어쩌면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때 그 아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저는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 아이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면 내뿜은 담배연기라고 하는 그 가사만큼은 더는 궁금하게 여기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뿐이랄까요.

     김광석도 그러나 요절을 했습니다. 왜 훌륭하거나 쓸쓸한 마음을 타고난 사람들은 모두 요절을 하는 것일까요. 김광석도 유재하도. 안톤 체홉도 다자이 오사무도. 모두 지천명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게 유독 오늘에 살아있는 사람을 더 슬퍼지게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름답고 고결한 것들이 반드시 세상과 불응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믿고 싶습니다. 단지 그 마음으로 하루 또 하루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런 마음을 버리지 않고서 말입니다.


나희덕의 귀뚜라미라는 시를 어릴 적에 참 좋아했습니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현대시들 중에서 남몰래 최고로 꼽곤 했지요. 시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그걸 학교에서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 싫어질 만큼이나요.

     비가 오는 초여름 밤. 모처럼 그때의 귀뚜라미가 다시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그때 그 아이도 실은 죽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기에 살아있다라고 읊조리는 그 시의 그 말이 그저 하염없이 좋고 또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 더 살았을 것입니다.

     요즘 저의 거의 유일한 낙은 가사가 시와 같은 노래들을 들으며 담벼락에 기대서 담배를 태우는 것입니다. 홀로 조용히 읽고 듣는 것만이 사실은 가장 안온합니다. 직접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이 빗소리를 지금도 듣고 계실 도처의 귀뚜라미들에게 닿을지 닿지 않을지 알지 못할 이러한 타전을 보내고 싶습니다. 귀뚜르르 뚜르르. 당신은 안녕히 계십니까.

     귀뚜르르 뚜르르.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노래가 되지 않아도 좋을 울음들이 그럼에도 아직은 현저히 살아있기를.

     그 가엾고도 강인한 고결함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하고 싶습니다.


글의 제목은 나희덕의 시 귀뚜라미의 한 구절에서 빌려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 매거진 출판 관련 공지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