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느 탈모인의 수기

탈모의 시작부터 끝까지

by 허건

1. 에피메테우스

의연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막상 닥치니 의연해지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고,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다. 탈모는 그렇게 시작됐다.

늦은 밤, 베란다 창가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배불뚝이에 머리는 듬성듬성 빠진 채로 게임기를 붙잡고 히히덕대는 내 모습.

창가에 비친 내 모습에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방 안에는 “무서운 나와 무서워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도 언젠가 떠날 것을 알았다. 언제나 푸를 줄 알았던 청춘도 노랗게 물들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후회하는 후회의 인간, 에피메테우스.

벚꽃처럼 떨어지는 머리카락. 찬란했던 봄날이 저물어 간다.


2. 치료와 부작용

탈모약에는 크게 2종류가 있다. 프로페시아로 대표되는 피나스테리드 계열, 아보다트로 대표되는 두타스테리드 계열. 효과는 아보다트가 더 뛰어나지만 그만큼 부작용의 위험도 크다.

100명 중 1명에게 성 기능 장애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나지만, 모발만큼은 단단히 붙잡아준다는 이 달콤한 유혹. 뿌리칠 수 없다.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다. 나는 악마와 거래할 것인가, 나의 대답은 예스다. 나는 프로페시아를 처방 받아 복용하기로 결정했다.

탈모 약을 복용한 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 별다른 부작용은 보이지 않는다. 성 기능은 복용 전과 다름없이 왕성하다. 우울증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탈모 약을 복용하며 우울증이 사라진 기분이다. 눈에 띠는 효과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복용 전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이 오히려 기쁨에 찬 환희와 넘치는 희망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3. 성지 순례

나는 좀 더 경제적으로 약을 구매하기 위해, 이른바 탈모의 성지라 불리는 종로 5가에 갔다.

종로XXX의원. 조그만 병원 대기실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와 같은 지병을 가진 청년, 중년 남성들이 북적북적. 같은 아픔을 지녔기에 그들을 공감하면서도, 여기까지 온 내 신세도 비참하여 나는 묵묵히 핸드폰만 바라봤다.

그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참을 수 없는 적막이 감돈다. 비어 있는 건 우리네 머리털뿐, 싸늘한 공기가 병원을 가득 채운다.

처방전을 받아든 약사 할아버지는 어디 시장통에서 순대 살 때나 담아줄 법한 검은 봉다리에 탈모약 세 갑을 넣어주었다.

이들은 확실히 프로다. 이전에 약을 구매했던 송파나 강남의 약사와는 달리 약봉지에 그 어떤 화려한 꾸밈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지병이 죄는 아니지만, 없는 죄도 만들어가는 이 삭막한 현대 사회 속에서 이 꾸밈없는 약 봉다리는 당당히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면죄부 느낌을 주었다.


4. 먹기와 바르기

매일 밤 10시가 되면 나는 부엌으로 가 프로페시아 1정을 정수와 함께 털어 넣는다. 이후 깔끔하게 목욕을 재계하고 헤어드라이기를 이용해 모발과 두피를 꼼꼼히 말린다.(목욕 시 샴푸는 2가지 종류로 2회 진행, 트리트먼트는 가볍게 마사지 후 5분 이상 유지 후 미온수로 헹굼)

이때 머리를 꼼꼼히 말리는 게 중요한 데 이유는 바르는 약인 미녹시딜을 도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다 말렸으면 책상에 앉아 간단히 토너와 로션을 바른 후 찬 바람을 쐬며 식은땀을 식힌다.

목욕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다시 화장실로 가 찬물로 손을 깔끔하게 씻은 후 '미녹시딜 로게인 폼'을 가져와 뚜껑을 연다.(찬물로 손을 씻어야 하는 이유는 손가락이 따뜻하면 미녹시딜 도포시 폼 제형이 녹아버리기 때문)

뚜껑의 모양은 지름 3cm에 높이는 4cm인 원기둥 형으로 여기에 로게인 폼을 약 절반가량 쭉 짜내면 약 1g 용량의 약품이 담겨진다. 로게인 폼의 제형은 이름답게 폼 형태로 쉽게 말해 무스와 같다. 다만 무스와 다른 점은 머리카락에 바르는 게 아닌 '두피'에 발라야 한다는 점이다. 미녹시딜을 도포할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점 중 하나다.

도포법은 간단하다. 이 무스 같은 약품을 나의 M에 무스 바르듯 도포하면 된다. 약을 바를 때 나는 주로 중지를 이용하는데, 이유는 딱히 없다. 중지에 반 마디 정도 약을 소분하여 M의 깊은 골짜기를 비롯하여 툭 튀어나온 가운데 능선까지 탈모가 지나간 환부에 스윽 바른 후 가볍게 마사지한다.

이마에 도포가 끝났다면 아마도 약이 조금 남을 것이다. 나는 이 약마저도 아직 시작하지 않은 미래의 탈모까지 원천 봉쇄하기 위해 정수리에 헌납한다.

탈모 약을 복용한 지 어느덧 일주일. 매일밤 거쳐야할 통과 의례가 나이 서른 넘어 또 늘어버렸다.

약품의 효과는 이틀째부터 곧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물기 제거를 위해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 때, 더 이상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지 않는다. 화장실과 방바닥에도 더 이상의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는다. 하루 종일 청소기를 돌리고, 돌돌이로 쩍쩍 바닥을 쓸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바닥을 더럽히던 머리카락이었다. 나를 희롱하듯 빠지고 또 빠지던 머리카락이었다.

이제 나는 청소기를 돌리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돌돌이를 구매하기 위해 값싼 구매처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머리카락에 막힌 화장실 배수구를 눈물 흘리며 청소하지 않아도 된다.

내 인생은 탈모 약을 먹기 전과 후로 나뉜다. 내 나이 서른둘,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나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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