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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기 그리고 시작

by lee나무

지나갔네요.

시간이.

1년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힘들고 성가신 일들을 해결해야만 하는 시간들을 살다 보면, 1년이 힘들기만 했던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납니다.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어젯밤 문득 떠난 여행지의 노천탕에서 밤하늘에 환하고 찬 달을 바라보며 그제야 천천히, 차분하게 지난 1년간의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어요.

머리는 차고 정신은 맑아 그 시간이 허락됨에 저절로 감사한 기분에 젖어들었어요.


2022년이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이틀에 한 번 재수하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어요. 백스무 통이 넘었어요. 아들에 대한 엄마의 사랑, 염려, 감사, 응원, 희망, 소중함, 기도 등을 담아서 편지를 쓰며 그 시간들을 살아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이렇게 열심히, 자주 편지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편지는 아들과 나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주었다고 믿어요. 말로 하기 멋쩍고 다소 부끄러운 것도 글로는 쓸 수 있잖아요. 문장과 문장을 사이에 두고 아들과 내가 있는 그 구조가 힘든 시간들을 서로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던 것 같아요.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작가라고 하기에는 스스로 부끄럽지만 삶을 기록하여 아들과 딸에게 엄마의 유산 하나 만들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한 일이었어요. 추억하고 싶을 때 꺼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아이들과 손자들이 가끔 도란도란 나와 연결되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시작이 반이고, 남은 반을 꾸준하게 채워가고 싶어요.


신앙을 가졌어요. 어렴풋이, 나이를 먹으면 신앙을 가져야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어요. 학교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도 한몫하였지만, 무엇보다 여름방학 때 성당에서 있었던 Marriage Encounter에 참석했던 것이 큰 계기가 되었어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로사리아’ 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답니다. 재수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새벽에 성당을 찾고, 100일간 묵주기도를 하며 모르는 사이 신앙인이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살면서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두 손 모으고 부를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집니다. 학교를 경영하는 역할을 함에 부디 낮은 자세로, 포용하며, 일어나는 모든 일에 지혜롭게 직면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기를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많이 걸었습니다. 걷고 걷고 걸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오감을 열고 감탄하는 시간은 순례이며, 나의 최애 시간입니다.


연말까지 성가신 일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묵은해가 지고 새해가 밝은 것도 느낄 여유가 없었어요. 일단락 짓고 난 뒤, 문득 일출이 보고 싶었습니다. 동해를 뚫고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보고 싶었습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수평선을 발갛게 물들이며 비상을 준비하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경건함, 신비함, 아름다움. 출렁이는 검은 파도, 어둠을 걷어내며 끼룩대는 갈매기들.



어느 날 문득 떠나 눈앞에 펼쳐지는 이 경이(慶異)로움 앞에 서면 ‘아, 삶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기뻐하고 긍정하게 됩니다.


새 힘을 내어 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이 '경이(慶異)'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요.

붉은 해는 날마다 바다를 뚫고 떠오르고 온 세상을 생명으로 이끕니다.

반복되는, 변함없이 지속하는 일이 '경이(慶異)'입니다.

* 동해 '문무대왕릉' 일출(2023.1.4.07:30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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