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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나무 Sep 05. 2024

낭만

그렇다. 나도 낭만이라면 로맨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풋풋한 남녀가 사랑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로맨틱이 로맨스와 연결되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음악회 부제가 <낭만적인 오후>이다. 아직은 여름의 쨍쨍한 햇살이 뜨거운 오후 2시, '낭만'이라. '풋풋'하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나도 모르게 피어난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낭만'은 '저 멀리' 있는, 탐하기에는 '호사'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낭만적인 오후>라는 부제가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마음에 든다.


"낭만은 프랑스어 Roman에서 기원하고 있는데요, 프랑스어로 로만은 소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낭만적이라는 말은 '소설 같은'으로 해석될 수 있어요."


피아니스트 김가림 님이 차분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로맨틱한 순간'은 '소설 같은 한 장면'으로 대체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들 평범한 삶에도 소설 같았던 장면들을 숱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 삶에서 가장 낭만적인, 소설 같은 순간이라면......'

속엣말과 함께 지나간 시간들이 되살아난다.


퇴근 후, 큰엄마 집에 맡겨 두었던 어린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모녀상봉의 기쁨을 노래하며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 어린이집에서 아들을 찾아 등에 업고서, 아들에게 "엄마는 준이가" 말하면 아들은 작은 목소리로 "좋아요" 하며 하루치의 그리움을 채웠던 날들.  강변 고수부지에서 연 날리며 달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와 남편. 결혼 25주년 겨울, 한라산 1100 고지에서 바라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설경. 산청 문수암 순둥이개 보리와 함께 절마당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날...... 그러고 보니 모두 가족과 함께한 날들이다.


모든 삶에는 '소설 같은' 순간이 있다. 회상하여 소설 같은 순간이 많다면, 낭만적으로 산 것이다. 낭만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니, 다른 말로 하면,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산 것이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일흔이 넘은 가수 최백호 님이 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나이를 먹으면 더 이상 낭만은 없는 줄 알았는데, 일흔이 넘어 보니 매일매일이 낭만이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나에게는,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 모든 것을 특별하게 느끼고 감탄하고 감사하는 능력'이 생겼다로 들린다. 잘 나이 드는 것은, 생에 '낭만적 순간'을 자주, 많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음악회는 부제처럼 <낭만적 오후>를 선물해 주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안세훈 님이 연주한 파가니니(N.Paganini)의 '라 캄파넬라'와 사라사테(P.Sarasate)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은 오후의 나른함을 깨우며 정신에 활력을 주었다. 첼리스트 임이랑 님의 '꿈꾸고 난 후에'(G. 포레)와 '백조'(C.Saint-Saens)는 몽롱한 꿈속을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게 했다. 피아니스트 김가람 님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사랑의 슬픔'은 (그라이슬러 원곡을 라흐마니노프가 편곡한 것) 정말이지 새롭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최고였던 것은 실내악(Chamber Music)이다. 멘델스존의 피아노 트리오 op49, 1악장 연주는 바이올린과 첼로, 피아노가 '서로 들으며 소통하는 즐거움'이 풍성하게 느껴졌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가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조화롭게 대화하는 하모니를 연출하였다. <낭만적 오후> 속을 여행하는기분이랄까.


곡 '나의 조국'으로 친숙한 스메타나(B.Smetana)가 첫딸을 잃고 쓴 곡, 피아노 트리오 op15, 4악장은 슬프고 아름다웠다. 초반에는 딸을 잃은 아버지의 깊은 고통과 슬픔이 휘몰아치듯 하다가, 어느 순간 고요하게 천국에 간 딸에게 아버지가 다정하게 말을 거는 듯한 음률이 이어졌다. 마치 '딸, 그곳은 어떠니? 춥지 않니? 외롭지 않니? 부디 아프지 말고 평안하길, 너는 아빠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단다.......' 같은 아버지의 아픈 그리움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독백은 어느 순간 굳건한 결심을 한 듯 묵직하게 바뀌었다. '천국에서 꼭 만나자. 아빠를 믿고 기다려야 해.  나중에 아빠가 꼭 찾아갈게.' 같은 어떤 결의가 느껴졌다.


죽음마저도 낭만의 일부로 승화시키는 음악의 힘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감동을 품고 돌아오는 길, '음악을 창조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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