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나를 위한 놀이가 남을 위한 일이 되는, 그 순수한 자기 몰두

by lee나무


아흔아홉 마리 양은 제자리에서 풀이나 뜯어먹었지. 그런데 호기심 많은 한 놈은 늑대가 오나 안 오나 살피고, 저 멀리 낯선 꽃향기도 맡으면서 제멋대로 놀다가 길 잃은 거잖아. 저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놈이야. 탁월한 놈이지. 떼로 몰려다니는 것들, 그 아흔아홉 마리는 제 눈앞의 풀만 뜯었지. 목자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 거야. 존재했어?

허공에 날아든 단도처럼, '존재했어?'라는 스승의 말에 뒷골이 서늘해졌다.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아흔아홉 마리 양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 문장에서 방점은 '생각 없이 떼로 몰려다니지 말고, 눈앞의 풀만 뜯지 말고, 뒤꽁무니만 쫓지 말고, 자유의지로 세상과 대면하라' 는데 있다. 그런데도 이 문장이 자꾸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불편함은 내 이해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그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처절한 생존을 이어가며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으므로. 기꺼이 방황하고자 하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존재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존재(存在)하다'의 사전적 뜻은 '실제로 있다'이다. '존재'의 의미는 1. 사람이나 사물이 실제로 현실에 있음 2.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람이나 대상 3.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외계에 객관적으로 실재함으로 정의되어 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모두 외계에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있고, 실제로 있다. '존재'의 필요조건은 충족된 것이다. 그러니 존재한다. 존재의 두 번째 정의가 걸린다.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람이나 대상'이라 함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다. '주위'라는 관계가 개입된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로 인하여 목자의 주목에서 제외되었다. 존재에 어찌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주위의 주목'과 '존재함'을 연결함은 '존재'라는 언어 기호에 인간의 의식과 관계를 투영한 개념이다. 애초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목자의 주목'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목자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마음을 쏟으니 목자에게 있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작아졌다. 그렇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존재함은 나 혼자서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이 된다. 도대체 '존재했어?'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닌 것 같은 이 허망함은.


이런 간단한 예가 해당될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자리가 있다고 치자. 참석한 모든 사람은 그 자리에 '실제로 있으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중 누군가는 회식을 주도하고 또 누군가는 이 자리가 얼른 끝나기만을 바라며 도망갈 타이밍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회식을 주도하는 사람은 '주위의 주목'을 받고 있으니 그 시간들을 존재한다고 하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사람'은 그 시간이 즐겁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힘들다. 존재가 사라진 그 시간들 속에 '실제로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힘든 일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코로나로 회식이 사라졌을 때 얼마나 많은 '부존재'의 사람들이 왜 그리도 기뻐했는지 이해되지 않는가. 나를 포함한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존재하고자 했던' 것이다.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자 했으나 존재하기 힘든 상황을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다. '존재함'에 대한 통찰이 필요한 것 같다. 이렇게 쓰고 보면 인간은 존재하고자 하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듯 느껴지는 소외된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존재함에 대한 발버둥의 하나겠지.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존재함은 특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함은 오히려 '다움'에 가까운 의미이다. 자기 다운 삶을 살고 있을 때 사람은 누구나 즐거움, 기쁨, 재미, 만족, 보람, 성장 등과 같은 언어와 가까워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존재함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와 타인의 존재함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속에는 곱씹어 볼 명제들이 가득하다. 끊임없이 방황하고, 기꺼이 길 잃은 양으로

존재하셨던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육성을 인터뷰 형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가운데, 툭툭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는 사고의 전환, 문학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 등을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묵직하게 빠져들 수 있었다.


"진실의 반대말이 망각이라고 그러셨지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맞아.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이다. 뇌리에 박히는 말이었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이 거짓이다. 며칠 전 '주옥순 베를린 원정 시위' 인터넷 기사를 접하고 할 말을 잃었다. 독일까지 찾아가서 소녀상 철거 시위를 벌이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까닭은 '은폐'에 있다. '진실이 마침내 이긴다'는 소박한 명제가 현실사회에 적용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일생을 바쳐 진실을 기록하고 전수하며 희망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무지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아갈수록 강렬하게 느낀다.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최고의 지혜라고 봤네. 자신이 무지하다는 걸 아는 자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한 사람이었던 거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프레임에 갇혀 사는지 스스로 깨달아야 해."


선생님은 남겨진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남기고 싶어 하셨을까. 나는 늘 우리에게 큰 별로, 방향성을 제시해주셨던 큰 어른들의 죽음이, 부재가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다시는 그분들의 육성을, 방황하는 현재에 대한 그분들의 생각을 들을 수 없다는 상실감이 컸다. 법정스님, 신영복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 박경리 선생님, 김근태 선생님,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내 젊은 날의 존재함에 빛과 소금이 되어주셨던 분들이다.

이어령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에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희망하셨지 않았나 싶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속 밑줄 긋기

가혹해도 케이스를 파고드는 거야. 처음에 쉽게 결정했던 일반론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거지. 그걸 깨닫기 위해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거야. 일반론이 진리인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하네.


자율성이 아니라 생명의 주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네. 개인의 생명에 국가나 제도가 관여하기 시작하면 그게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결정 같아도 위험해.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면 코끝의 바람 한 줄기도 허투루 마실 수 없는 거라네.


우리가 내일 이 대화를 나눴더라면 오늘 같지 않았을 걸세. 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다워. 지금 여기.


나는 오늘도 내일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 신념에 기대 사는 건 시간 낭비라네. 말 그대로 거짓이야. 신념 속에 빠져 거짓 휴식을 취하지 말고, 변화무쌍한 진짜 세계로 나와야 하네.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꿈 깨면 죽는 거야.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큰소리치고 이간질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여기저기 오가며 함께 뛰는 '사잇꾼'이 돼야 해.


추방하고 격리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야. 반대로 상처와 활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사회, 그게 창조적인 사회고 희망이 있는 사회라고 나는 말하는 걸세. 그래. 악, 퇴폐, 질병..... 이런 것 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진짜 건강한 사회야. 술주정뱅이, 거지 이런 낙오자들을 싹쓸이해서 가둬버린 무균 사회는 희망이 없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