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되는 때를 알고

네가 있음 내가 나일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by lee나무


비가 옵니다.

비가 오면 생각합니다.

촉촉하고 폭신한 흙을 맨발로 느끼는 호사를 누려야겠다고.

일 년에 단 몇 번 만을 누릴 수 있는 호사입니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특히 그러합니다.

꼽아 보아 열 손가락 안에 들겠지요.

비가 따뜻하면서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날이. 맨발에 차오르는 물기와 흙이 온몸을 타고 기분 좋게 흐르는 듯 느껴지는 날이.




운동장에 물이 차오르면 운동장도 호수처럼 빛의 잔영을 그려냅니다. 한 번도 빛을 반사해 본 적 없는 운동장은 비를 품고 자신을 둘러싼 풍경들을 비추어 냅니다. 늘 변함없이 동행이 되어주는 존재들을 알아차리고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잖아요. 그들을, 그들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음을, 이렇게 늘 '나도 너와 같이 동행이 되고 있음'을 말없이 그려내는 것이지요. '내가 너임을, 네가 있음에 내가 나일 수 있음'을 말입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잠시 동안에 운동장은 빗물을 담아서 발바닥에 찰랑이는 얕은 호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허용되는 시간만큼 기꺼이 풍경들을 고스란히 투영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나도 이처럼, 내게 허용되는 때를 알고 함께하고 있는 존재들의 고유함을, 아름다움을, 고마움을 품고 투영할 수 있기를 하며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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