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육남이 Dec 16. 2024

결국, 가족이 전부다

  2024년의 12월의 어느 날, 사내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념으로 송년회를 하게 됐다. 30여 명이 넘는 부서원들이 한데 모여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앞에 술 한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정말 반가웠다. 잦은 회식은 다소 거부감이 들지만, 이따금씩 찾아오는 회식은 여전히 설렌다. 음식도 맛있고 대화도 즐거워 그날 꽤나 많은 양의 소주를 마셔댔다. 그렇게 다음 날이 찾아왔다.



  전날 과음을 해댄 탓에 쓰린 속을 달래며 꽤나 고단한 출근을 해냈다. 속에 뭐라도 들어가야 이놈의 미식 거림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 점심에는 해장을 하겠다며 쌀국수를 뱃속에 들이밀었고, 조금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국물까지 다 마셔댔다. (그래도 속은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숙취가 덜 풀렸던 이 날, 아내는 부서 회식 일정이 있었고 아이를 돌봐주시는 어머니 또한 개인 일정이 있어 이른 조퇴 후 아이를 혼자 돌보게 되었다. (만 8세 이하의 아이를 키우는 공무원은 36개월 기간 동안 하루에 2시간의 '육아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당일 이른 퇴근을 하게 됐는데 지하철 안에서 몸을 싣고 나니 왠지 으슬으슬 함이 느껴졌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가? 하긴 그렇게 마셔댔으니 몸이 축이 날 수밖에.' 지하철에서 한잠 자고 나면 나아질까 싶어 철제 시트에 몸을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어느새 익숙한 동네에 다다랐다. 선잠을 잤던 탓인지 개운치 않은 몸을 이끌고 그렇게 집으로 향했다.



  아이 하원을 도와주신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집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누워버렸다. 본인의 몸 상태는 의사가 아닌 스스로가 제일 잘 아는 법. 보통과 다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혹시나 걱정하실 장모님을 얼른 보내드리고 아이와 단둘이 함께하는 시간을 맞이했다.



  주중에는 저녁 이후밖에 볼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을 감안해 최선을 다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고자 하려 하나 이 날 만큼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 옆에서 큰 대자로 누워 멍하니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점점 오한이 오고 열기운이 느껴지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체온계를 쟀더니 다행히 크게 열이 오르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체했던 게 아닐까 싶다.)



  머릿속으로 대략 상황이 그려지는가? 겔겔대고 있는 내 옆을 신나게 뛰어다니는 딸아이.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게 술을 들이켠 날에는 '내가 다시는 술 이렇게 마시나 봐라.' 하며 결단을 내리고도 매번 술이라는 녀석에게 지고 마는 나라는 녀석이 싫었고, 이 때문에 아이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가족이 보고 싶어졌다. 이유가 어떻든 몸이 아프면 되면 자연스레 가족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가족. '혼인, 혈연관계로 맺어져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집단 공동체'라 사전에는 정의되어 있다. 가족은 여러분에게 어떤 존재인가? 편안한 안식처? 아니면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으나 다소 거리감 있는 집단? 여러 존재로 인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다음과 같다. '내 치부가 있더라도 결국에는 감싸주고, 내 편에 서 끊임없이 응원해주는 집단.' 말이다. 그런 때가 있었다. 18개월 간의 육아휴직 이후 오랜만에 복직을 하게 된 나는 한동안 회사 부적응자로 굉장히 불안함에 시달렸다. 당시의 상황을 회피하고자 급기야 일을 관두고 싶다는 말을 아내에게 수백 번은 넘게 말했다. (지금 보니 철딱서니 없는 생각이지만.)



  가장으로서 무책임한 말임도 맞고 이기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해대는 내 모습을 보고 아내는 어떤 말을 건네었을까? "그래, 관둬. 힘들면 관둬야지. 당신은 다른 일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물론 그 이후 다른 질책도 이어지긴 했으나, 그 말 한마디는 평생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다. (그 덕분에 나는 언제나 회사를 가볍게 다니려고 한다.) 말 한마디는 분명 천냥 빚을 갚는다. 그런데 그 말을 가족에게 들으면 어떻게 될까? 천냥이 만냥이 되어 돌아온다.



  다시 그날의 이야기로 시간을 되돌려본다. 겨우 몸을 일으켜 아이를 목욕시킨 후 아이에게 저녁으로 '딸기'를 먹였다. (밥은 안 주고 그냥 딸기만.) 몸은 으슬으슬 떨리고 오한이 오는 상황에서 가족이 그렇게나 보고 싶었다. 둘이 있으면 언제나 육아에 천하무적이었던 아내도 그리웠고, 손주 옥구슬 다루듯 예뻐해 주는 부모님도 이날 따라 간절히 보고 싶었다.



  늦은 밤, 아내 그리고 부모님이 차례로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가족의 존재를 다시금 깨닫는 시간, 몸은 괜찮냐며 물어보는 아내와 엄마,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는 나를 슬쩍 보고 가던 아버지를 비롯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빠, 약!" 하며 내게 장난감 하나를 건네는 아이의 모습까지 이렇게 가족은 내게 영화 <어벤저스>에 나오는 히어로급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존재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이렇게나 가족들은 내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살펴주며, 응원을 도모하고 진심으로 잘되길 빌어주는 존재가 가족 외에 누가 있을까 싶다. (인간계에서는 아마 없지 않을까? 있다면 내게 알려주길 바란다.)



  몸이 조금 회복된 그다음 날의 저녁,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사골곰탕을 저녁으로 올려주셨다. 깊게 우려낸 사골국물처럼 가족의 깊은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다가오는 2025년, 우리 가족들에게 멋진 남편으로, 귀감이 되는 아빠로 그리고 덜 못난 아들이 되길 바라며 새해의 나만의 방법으로 그들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