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거실 불을 끄면 지레 겁먹는 아이였고, 티브이에 귀신 이야기라도 나오면 눈을 질끈 감거나 채널을 돌려버리는 겁 많은 아이였다. 유치원에서 수영장에 놀러 갔을 때, 물을 무서워하는 나를 유치원 선생님이 번쩍 안고 있는 사진 한 장이 이를 대변한다.
내 한 살 아래 연년생 남동생은 이런 내 성향을 진작 알았던 탓인지 언제나 나를 이겨먹기 일쑤였다. 형이라는 이유로 양보한다기보다 동생과의 기싸움에서 이미 져버린 셈이었다. 참고로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주먹다짐을 해본 적이 없다.
학창 시절도 별 다를 바는 없었다. 왜소한 체격과 말주변이 없던 나는 속칭 반 주류의 아이들이 노는 틈에는 끼기 힘들었고, 그냥 순한 아이로 조용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한 번은 주류의 아이 중 하나가 내게 관심을 보여 아주 잠깐 그들의 무리에 낀 적도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나는 운이 지지리도 없게(?) 남중남고를 나왔다. 안 그래도 숫기 없었던 나도 내심 남녀공학에 다니고 싶긴 했는데,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 옆 짝 친구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었다. 참고 참아도 그렇게도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를 내내 괴롭히던 그 녀석.
그 아이와 나는 모든 게 같았다. 스포츠머리에 동일한 교복. 아 한 가지 다른 게 있긴 했었다. 그 친구의 가방에는 'EASTPARK'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내 가방엔 'EASTPACK'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단 차이 정도? 다행스럽게 그 아이와의 인연은 양쪽 아버지의 만남을 통해 정말 신기하게 쏙 사라졌다.
(아빠는 그때 그 녀석의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걸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중학교 시절과 너무나 똑같아서 생략하고자 한다. 이것 하나만 말하고 넘어가겠다. 내가 자율학습을 제껴 본적이 3년 내 딱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 나는 원래 이런 소심한 놈이다.
2022년 9월, 딸아이가 내게 찾아왔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내가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본래 부모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을 아이를 통해 이루고자 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나도 처음에는 그런 아빠가 되고 싶었다.
평생을 내 주장 없이 살아왔던 삶에 대한 후회가 있어서였는지, 우리 품에 안긴 아이만큼은 당당하고 표현력 있는 아이로 키워내고 싶었다.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어느 정도는 욕심이 있는 아이. 그 아이가 내 아이가 되길 바랐다.
결론적으로 내 딸아이는 그 어느 누구도 닮지 않았다. 새로운 언어를 표출할 때 수줍게 말하는 모습에선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내 거야!", "내가 일등이야."라는 강한 주장을 펼치는 모습을 볼 때면 당당한 아내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장모님께서는 어렸을 적 아내의 고집이 그렇게 셌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아이에게 투영시켜야 한다는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 스스로 깨우쳐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다만, 그 과정에 있어 심하게 왜곡된 행위를 할 때만 제제하는 것으로 나의 최소한의 역할을 정해 본다.
아이가 나를 닮을까 봐 걱정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다. 아이는 독립된 자아이고, 혹시나 내 어릴 적 모습과 유사한 행동을 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건 단지 나만의 착각일 뿐이다.
내성적인 아빠는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단번에 바꾸어낼 수 없다. 다만, 아이 앞에서는 이전의 나보다 아주 조금은 더 용기를 내보려 한다. 아이에게 지금의 나는 거대한 산과 같이 보일 테니 말이다. 그 산이 모래산이 아닌 돌산임을 보여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