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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버스인가요? 디스코 팡팡인가요?

by 자향자

수시전형으로 대학에 갈 것이라는 핑계로 수능 공부를 일절 하지 않았던 나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수시 지원한 몇몇 대학교에서 여봐란듯이 일괄 탈락을 쓴 잔을 맛보게 된다. 사실 지원을 하면서도 내가 그 대학에 갈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수시 준비를 위해 별도의 대외활동이나 수상 경력 하나 없이 그저 주야장천 그저 그런 내신 성적에만 집중했으니, 지원서에 뭐 하나 제대로 써넣을 거리조차 없었던 게 당연했다. 이건 예견된 일이었다.



애초에 수능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망했다'라는 개념을 쓰기도 민망하지만, 어쨌든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능 시험은 쫄딱 망해버렸다. 재수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던 터라, 수도권의 한 사립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넣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럼 나는 무슨 과를 지원했을까? 다른 과목에는 큰 관심은 없었지만,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 그나마 있었다. 영어영문학과에 넣으면 혹시라도 대학교에 떨어질까 봐 아침인사로 "구텐 모르겐"을 외치는 독어독문학과로 진학하며 본격적인 대학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왜 하필 그 학교를 선택했을까?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첫째로 집에서 가까워 다니기가 용이했고, 두 번째 이유를 대보자면, 해당 학교 진학을 탐탁지 않아 하던 아버지가 내걸었던 조건 때문이었다. 통학거리를 짧게 잡고, 남은 시간을 활용해 편입 준비를 하라고 하셨던 것. 그 두 가지 이유뿐이었다.



무려 3년 동안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닭장 안에만 갇혀있다가 내 마음대로 시간표를 짜고, 수업을 선택해들을 수 있는 대학 생활이 정말 반가웠고 신기했다. 심지어 수업을 빼먹을 수도 있었으니 이런 게 진정한 자유 아닌가 싶었다.



술도 마음껏 마실 수 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도 벌 수 있으니 당시 그보다 더 좋은 시절은 내게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24시간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었던 대학생활은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



집에서 대학교까지는 마을버스를 타는 것이면 충분했다. 대학 동기들은 서울의 어느 곳에서 버스를 탔다가 지하철을 갈아타고 1시간 넘게 걸리는 이동거리를 나는 마을버스를 타고 20분 남짓만 오면 됐으니 축복(?)이었다.



'카운티'라 불리는 마을버스를 혹시 아는가? 25인승 준중형 버스로 기존의 버스보다 작고 기동력이 좋아 골목 이곳저곳을 누빌 수 있는 카운티 마을버스. 나는 항상 이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심지어 내가 마을버스를 탈 때면 자리가 텅텅 비어있어 원하는 자리에 골라 앉을 수 있었다.


지지리도 복도 없지. 중고등학교 6년을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다니다, 대학교에 와서야 근거리 통학을 하게 된 사실이 진짜 웃프지 않은가? 그것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간 대학교에서 말이지.



버스 탈 때는 항상 뒷자리를 선호했다. 어릴 적, 학교에서 꽤나 논다는 친구들은 야외활동 갈 때, 항상 버스 맨 뒷자리에 앉곤 했다. 그런 게 부러웠던 거였을까? 아니면 안정감 있어 보이는 구석 자리를 선호했던 걸까?



여하튼, 버스 타고 학교 가는 길이 사실 좀 재밌기도 했다. 이유인 즉, 마치 놀이기구 디스코 팡팡을 탄 것처럼 카운티 마을버스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통통 거림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쇼바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정도로, 과속 방지턱만 만나면 엉덩이가 들썩들썩 거리는 그 느낌.



아스콘 상태가 좋지 않은 노면을 달리는 구간은 정말 쉴 새 없이 튀어대는 몸뚱이 덕분에 안전 손잡이를 꼭 붙잡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덜덜 거림에 목소리마저 함께 떨리는 정도라 한다면 어느 정도 상상이 되지 않는가?


학구열이 아니라 목적 없이 그저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학교까지 입성하게 됐다. 편입 준비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대학등록금을 내준 아버지와의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매일 술 마시기 바쁘고, 돈 벌어보겠다며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 인생 대학교 1학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우리 딸이 훗날 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될지 아니면 큰 꿈을 꾸고 남들과 다른 길을 갈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대학교에 진학을 한다면 본인이 꿈꾸는 학문에 대한 조금 더 깊은 통찰을 해냈으면 하는 바람이고, 자영업이나 내가 상상하지 못한 다른 도전에 나서보겠다 말하면 그의 결정에 진심 가득 담은 응원을 보낼 수 있는 아빠가 되었으면 한다.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사는 이가 아닌 본인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딸아이가 되길 바란다는 말이 가장 정확하겠지만. 딸아이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목표가 무엇인지 이거 하나만큼은 꼭 함께 찾아주고 싶다. 그날까지 내 부모가 나를 30년 넘게 믿었듯 나 또한 그녀를 영원히 응원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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