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연휴 시작의 첫날, 아내 그리고 딸아이와 함께 오랜만에 야외활동에 나섰다. 긴긴 추석 연휴 덕분에 몰아치듯 내려오는 상위 부서의 오더에 따라 내년 업무계획 세우랴, 갑작스레 배정된 새로운 업무를 소화하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3분기를 보내고 한낮에 여유롭게 아이 손을 잡고 집 밖을 나섰다.
그날 우리 가족의 목적지는 뮤지컬 공연장이었다. 얼마 전, 서울 어느 곳에서 봤던 ‘바다 100층짜리 집’의 여운이 가족 모두에게 남아 있었던 탓일까. 이번에도 뮤지컬 공연을 선택하게 됐다. 다만, 집 근처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가격도 1만 원이라 전혀 부담 없었고, 무엇보다 '프린세스 공주 뮤지컬'이라는 타이틀과 같이 공주를 테마로 한 뮤지컬이었으니 요즘 들어 ‘공주’에 푹 빠진 딸아이에게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아이는 심지어 잠을 잘 때도 공주 옷을 입고 잠에 들길 원한다.)
“호떡아, 우리 공주 뮤지컬 보러 갈 거야.”
“우와! 신난다!”
공연 당일, 아이는 예상했던 바와 같이 시크릿 쥬쥬 공주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공주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한참을 빙글빙글 돌던 아이는 진짜 공주가 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랄까.)
공연장 입구에 도착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수많은 아이들이 각자의 ‘공주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이 세상의 작은 꼬마 공주님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럼 뮤지컬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을까? 세계 최고의 공주를 선발하는 대회에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과 같은 유명 인사들 틈 사이에 그저 이름만 ‘공주’인, 조금은 초라한 참가자가 나타난다.
그녀는 문전박대를 당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던 길 우연히 만난 ‘왕자’라는 인물과 함께 다시 세계 최고의 무대에 오르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사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다. 시련을 겪고, 조력자를 만나고, 결국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며 성공하는 이야기.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흔한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며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용기를 냈던가. 오지도 않은 미래를 막연히 두려워하며 움츠러들기만 했던 건 아닐까. 별 생각이 다 들더라.
주인공 '공주'는 결국, 지혜와 덕, 그리고 건강한 마음을 갖춘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그 모습은 어쩐지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바람과 닮아 있었다.
뮤지컬은 언제나 내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했다. 우연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 그렇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날 그 한 편의 뮤지컬이 내게 전해준 메시지는 대단한다. (눈물이 살짝 고일 정도였으니까.)
아내에게, 딸아이에게 공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회사 일로 예민했던 날, 말 안 듣는 아이에게 화를 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요즘 자주 되새기는 말이 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 가족을 위해 일하는 것인데, 정작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삶이라면 그건 주객이 전도된 삶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공주가 되기로 결심했다.
'삶을 나답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한 편의 뮤지컬의 메시지에 따라, 조금은 이기적으로 그리고 나답게 살아가보려 한다. 딸아이 앞에 멋진 공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