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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내게 남긴 말

by 자향자

지난 9월 어느 날부터 딸아이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발레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맛보기 식으로 발레 수업을 하나 듣고 오더니 엄마 앞에서 재롱을 그렇게나 부렸나 보다.



매주 금요일 5시부터 6시 사이에 이루어지는 1시간의 수업. 12주, 3달간 이어지는 딸아이의 수업 일정에 부모인 우리가 번갈아가며 아이를 바라다 주기로 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조금 더 이른 퇴근을 요했던 게 조금 부담이었다만, 딸아이가 그렇게 좋아한다니 왕도는 없었다.



하나, 내 마음대로 그리 스케줄이 조정될 리 없었다. 툭하면 터져버리는 사내 사건 사고들 덕분에 나보다 어쩌면 딸아이를 더욱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의 업무를 제쳐두고 딸아이를 수업에 바래다주곤 했다. 이런 아내에게 늘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아이를 바래다줄 기회가 찾아왔다. 기본값으로 아내가 늘 맡아오던 발레 수업 등·하원 기회가 드디어 못난 아빠에게 찾아왔다.


"아빠가 엄마랑 번갈아가면서 금요일마다 발레 수업 데려다줄게"

"응"


아이와의 약속을 무색하리만큼 져버리곤 했던 나였지만, 이날만큼은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오후 3시 이른 조퇴를 하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냉큼 집으로 향했다.



"아빠다." 머리를 단정히 땋고, 요구르트를 입가에 묻히며 웃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 낮시간에 딸아이의 모습을 본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낮시간 퇴근을 한 아빠의 모습에 조금은 생소해하는 딸아이의 표정 그 순간, 아이에게 쌓였던 미안함이 조금이나마 용서받는 느낌이었다. (아이의 마음도 조금은 환해지지 않았을까.)



딸아이는 요즘 세상에서 가장 발레복을 입는 것을 좋아한다. 주섬주섬 발레복을 입히고 차에 올라 이동하며 아이에게 물었다.


"발레 재밌어?"

"응, 선생님도 예뻐."

"이름이 뭔데?"

"몰라"

"그래? 그럼 오늘은 이름을 물어보자."


작은 미션을 건네며, 내성적인 아이에게 해보자는 용기를 살짝 심어줘봤다. (결국엔 안 물어봤단다.) 발레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에 몇 주 만에 처음 들어가 봤다. 선생님께 인사를 건네니 선생님이 묻는다.


"아버님, 교재 가져오셨어요?"

"무슨 교재요?"

"발레 수업 교재요."


아차차. 아내가 말했던 걸 또 잊어버렸다. 옆 친구와 같이 보면 된다는 선생님의 말에 송구스럽고, 아이에게도 미안하다. 아마, 아이도 알고 있었을 게다.



아이가 발레 수업을 받는 동안 부모는 문 밖에서 기다려야 한단다. 책을 펼치며 잠시 여유를 맛봤다. 주중 정신없이 달려왔던 한 주를 보상받는 느낌이다. 로비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엄마들, 홀로 앉아 있는 몇몇 아빠들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늘 이런 시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발레 수업 잘 들었냐는 아이에게 무심한 척 툭 하고 물어본다.


“아빠, 회사 다니지 말까?”

“응, 맨날 같이 다니고 싶어.”

“나도 그러고 싶다.”


단순한 바람일까 아니면 진심으로 전하는 목소리일까. 아이의 한마디에 아빠의 심장은 다시 쿵쾅 거린다. 딸아이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나다. 그럼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믿고 나아가봐야 하나?



아이를 통해 어른은 성장한다. 그날 오후 딸아이와 만남이 내 삶의 또 다른 원동력이 되길, 새로운 삶의 재화로 쓰이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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