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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을 건 없어요, 그냥 그대로인 거예요

by 자향자

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처남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형, 김장해서 저녁에 수육 해 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드실래요?"

"너무 좋지."


처남네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살고 있다. 우리와 나이대도 비슷하고, 이따금 만나 밖에서 때로는 서로의 집에서 술 한잔 기울일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나누곤 한다. 이런 주변인이 내 옆에 있음에 늘 감사하다.



사실은 그날은 내게 주어진 며칠 안 되는 소중한 자유 시간이 있는 날이었다. 아내가 딸아이와 함께 지인댁을 방문했던 턱에 오전엔 홀로 자유(?)를 만끽했고, 늦은 오후 즈음 돌아오는 그들을 맞이하며 다가올 월요일을 준비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늘 계획일 뿐, 이렇게 훅- 계획이 틀어질 줄은 몰랐다. 요즘 들어 처남 내외와 만나는 날이 많았는데, 어쩌면 그날도 나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반가운 계획 변경임은 분명했다.



처남의 전화를 받고 이제 막 돌아온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처남집으로 넘어갔다. 처남의 말에 따르면 전날 장모님의 지휘 아래 70 포기의 김장을 했다고 말했다. 날씨가 참 오묘한 요즘이지만 김장 얘기가 나온 걸 보니 겨울이 다가오긴 했나 보다.



고생해서 만든 김치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나는 베푸는 삶을 살아왔는지 잠깐 되돌아본다. 단출한 음식이라 말했던 처남댁의 말이 무색하게 식탁 위에 어제 갓 만든 김치 그리고 오겹살로 만들었다는 수육이 푸짐하게 한상 차려져 있다.



고기 한 점에 갓 만들어낸 김치 한 점을 싸서 입에 넘기니 그보다 행복할 순 없었다. 사실, 행복이란 건 별거 없다. 순간의 삶에 집중하고 그 소중함을 가늘고 길게 이어나갈 수 있다면, 행복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맛깔난 안주에 소주 한잔이 빠질 리 없다.



술을 좋아하는 처남과 한창 술잔이 오가던 그날, 취기에 처남이 내게 이런 말을 말했다.


"매형 덕분에 용기라는 단어를 다시금 찾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나? 나 뭐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데 뭐"

"친구들 만날 때마다 매형네 얘기 자주 해요."

"왜 ㅋㅋㅋ"

"매형네 부부는 뭔가 해낼 것 같대요."


대수롭지 않게 그 대화를 넘겼지만, 사실 당시 그 말은 내게 큰 울림이었다. 소주 한잔 마시며 삶이 괴롭다고 한탄하는 대화가 주류이던 우리였는데, 그가 내게 그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에게 취기에 이런 말을 했다.


"나 곧 육아휴직 들어가잖아. 솔직히 좀 무섭다."

"매형, 괜찮아요. 잃을 건 없어요. 그냥 그대로인 거예요."


설령 제대로 된 육아휴직을 보내지 못한다고 해도 다시 돌아갈 회사가 있다며,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처남의 말이 참 위로가 됐다. 늘 내편인 아내에 이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응원의 메시지. 취기에 그에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볼게. 처남. 우리가 집안 살려보자."

"좋아요."


그날 가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날의 초대는 '할 수 있다.'라고 그리고 힘내라고 건넨 김치 한 점이었을 수도 있고, 불안한 미래를 내딛는 내게 건네는 새빨간 용기 덩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더 이상 시시하게 흘려보내긴 싫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고, 후회 없이 한 해를 살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처남의 말대로 되돌아갈 곳이 있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잃을 건 없어요. 그냥 그대로인 거예요."


처남이 내게 건넨 그날의 한 마디. 아마 평생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모든 어려움의 한 가운데에는 기회가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어려움의 중심으로 이제 내 발로 들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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