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로망
영화를 봤다. 여주인공은 27살쯤 죽고 싶다고 말하며 마찬가지로 27살쯤 죽고 싶다는 기타리스트를 만나 사귀었다. 그리고 떠올렸다.
'내게도 저런 로망이 있었지..'
어렸을 적 나는 지금 흔히들 말하는 락찔이였다. 16살이란 나이에 겁도 없이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처음 보는 형 누나들을 만나 메탈리카 내한공연도 가고 각종 락 페스티벌에 출석도장을 찍고는 날이 저물도록 놀았다. 그 시절의 나는 수학공식을 외우듯 각종 락 메탈 장르들과 대표 밴드, 곡을 줄줄 외는 미친놈이었다. 물론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무대 위 밴드의 멋만을 동경한 중2병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중2병 환자들이 그러하듯 나는 정말 잠시나마 경로를 밴드로 정했고 아무 생각 없이 커트 코베인처럼 짧고 굵게 27살쯤 죽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올라 산화하는 삶. 그것이 그 당시 죽음에 관한 내 로망이었다.
물론 나는 정말 밴드의 길을 걷진 않았다. 친구는 베이스. 나는 기타. 계획까지 세웠지만 기타 값이 비싸다는 구린 이유로 나는 물러섰다. 부모님에게 조르지도 않았고 알바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딱 그 정도의 깊이였던 것이다. 반면 그때부터 베이스를 치기 시작한 친구는 지금도 밴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해본다.
'만약 그때 기타를 샀더라면 나는 지금 기타리스트가 되어 있을까. 그랬다면 나는 지금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까'
딱히 흑역사라고 할 것도 없는 중2병 시절을 거쳐 나는 27살을 약 두어달 쯤 남겨두고 있다. 영화 덕분에 다시금 떠올려본 죽음에 관한 내 로망. 로망의 형태는 많이 일그러져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지도 않았기에 산화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불꽃처럼 타오르더라도 산화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의 나는 단명과 장수라면 당연히 장수를 고를 것이기에.
물론 그것은 내가 허무한 죽음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 탓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었던 시한부의 삶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극적이지도 않았고 처지를 슬퍼할 시간도 없이 떠났다. 일하다 갑자기 쓰러진 중년 사내는 아내와 아이들의 눈물에 기적처럼 눈을 뜨지도 않았다. 욕실에서 미끄러졌다는 이유로 세상을 떠난 경우도 보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진정으로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죽음에 관한 내 로망을 생각해봤다. 10년 전쯤의 나는 오로지 과정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역사에 남을 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될 무언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나 영원히 기억되고 싶었다. 영원히 살 수 없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리라.
10년쯤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중요한 것은 물론 과정이지만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할 준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허무한 죽음이라고 느꼈던 죽음의 공통점은 준비였다.
그들은 모두 가정을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저마다 불꽃을 태워오며 살아왔다. 그 불꽃은 나 같은 건 감히 꿈도 못 꿀 만큼 뜨겁고 찬란한 불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할 준비, 세상을 떠나갈 준비 과정이 없었다.
영국에는 죽음과 관련하여 토론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모임 활동이 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있다. 그 모임의 구성원들은 노부부도 있고 이제 갓 학교에 입학한 아이와 부모님도 있었다. 당시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으며 저런 모임이 있다는 사실이 혐오스럽게까지 느껴졌었다. 어쩌면 내 반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는 주제였다. 그 누구도 부모님 혹은 가족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보면 상당히 좋은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글픈 사실이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따지고 보면 태어난 이후로 우리는 늘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셈이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충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현재 단순히 장수를 바라는 것은 아직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현재 그 누구와도 이별하고 싶지 않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사람들과 이별할 준비도 필요하고 애착을 가진 물품과 추억과 이별할 준비도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하루라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내가 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면 남겨진 사람들은 나처럼 크게 바닥을 뒹굴지 않고 좀 더 빨리 일어설 수 있을까.
나는 내 죽음으로 인해 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단 하루라도 더.
'나도 내 사람들도 준비된 죽음.' 이것이 현재 내 죽음에 관한 로망이다.
물론 세상에 납득할 수 있고 준비되어 있는 죽음이란 것은 없다. 그렇기에 이것은 죽음에 관한 로망이 아닌가. 그저 다시 10년 뒤에는 이 로망이 어떤 형태로 뒤틀려갈지 조금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