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8월 해가 산꼭대기에 걸터앉아 있을 무렵 쉼 없이 목젖을 울려 되며 우렁찬 울음소리가 강원도 정선군 산골마을 어느 집에서 울려 퍼졌다. 목이 쉴 정도로 울어대던 아이를 보며 "요 녀석 노래 하나는 잘하겠는데!" 엄마는 갓 태어난 나에게 말을 건넸다고 한다. 4살 무렵부터 제대로 된 말을 하게 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를 시작했다. 옆집 뒷집에 사는 오중이와 효선이랑 놀 때도 나는 노래를 불렸고, 혼자 집 앞 처마 밑에 앉아서 놀 때도 노래를 불렸다. 그냥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이 좋았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아이든. 어른이든. 나의 노래에 환한 미소로 반응했고. 엄지손가락을 지켜 세우며 "노래 잘하네! 너 커서 가수 해도 되겠다!"라는 말을 듣을때마다 나는 더 자주. 더 많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노래를 듣던 사람들의 표정이 좋았고. 나를 칭찬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좋았다.
8살이 되면서 나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음악시간이 있었다. 매번 나의 박자대로. 내 마음대로 불러 대던 노래가 선생님의 손가락 끝에서 만들어내는 풍금소리의 리듬에 맞추어 노래를 따라 부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박자 먼저 시작하기도 하고. 한 박자 늦게 시작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박자와 나의 박자는 따로 놀았다. 그냥 재미있게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 나에게 음악시간은 재미있게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아니었다. 음표를 공부하고, 박자를 공부하고, 계이름을 외우면서 음악은 점점 재미보다는 외우고. 배우 고를 해야 하는 공부였다. 노래를 좋아하지만 음악시간은 싫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쉬는 시간이든. 아이들과 노는 시간이든.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만의 박자로. 나만의 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았다.
모든 수업이 끝난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학교에 합창부가 생길 거라는 말씀을 하셨다. 작게는 동네 작은 대회에서부터 크게는 전국 합창대회까지 참가도 할 예정이라고 하셨다.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합창부가 될 수 있어요!" 담임선생님의 이 한 문장에 나는 합창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쉼 없이 목젖을 울려 대면서 울어대던 나의 출생부터.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대던 나의 노래실력이라면 나는 충분히 합창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우리 학교가 여러 합창대회에서 입상하는 것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짝꿍 혜진이와 나는 서로 눈빛으로 "너도 할 거지?""너도?" 눈빛 교환만으로 우리 둘은 합창부에 지원하기로 했다. 혜진이는 음악시간에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아주 잘한다. 한 번은 선생님께서 혜진이를 풍금 옆에 세워두고 풍금소리의 리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려 보게 했다. 혜진이의 맑고 고운소리는 우리 반을 가득 채웠고 혜진의 노랫소리에 모두 집중했다. 그 뒤 혜진이는 새로운 노래를 배울 때마다 풍금 옆에 서서 노래를 불렸고 우리 반에서 노래를 제일 잘하는 아이로 불려지게 되었다.
합창부에 지원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우리 반에서는 나와 혜진이 그리고 2~3명의 친구들이 신청했고 다른 학년과 다른 반에서 열대명 정도가 신청을 했다. 합창부는 각자의 파트별에 맞게 목소리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합창부에 지원한 사람보다 합창부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많았기에 따로 테스트를 받지 않고 오늘 모인 사람들로 합창부를 만들어 보자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그날 바로 노래 연습이 시작되었다. 풍금소리의 리듬과 지휘 선생님의 지휘봉에 따라 노래가 시작되었다.
노래를 다 듣기도 전에 지휘 선생님은 노래를 멈추었고. "다시 한번만! 다시! 또다시!"
노래 진도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음에 답답함을 느낀 선생님은 한 명 한 명의 노래를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즐겁게 노래를 부고 있던 나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빠른 템포의 작은북 소리가 나의 마음속에 콩닥콩닥 울러 대기 시작했다. 나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작은북의 템포는 더 빠른 템포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지도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렸다. "너네! 문제가 너였어!" 지휘 선생님은 노래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나였다고 많은 아이들 앞에서 오른손에 잡고 계셨던 지휘봉으로 나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합창을 할 수 없으니 가방을 들고 집으로 가"
지휘 선생님의 말에 나의 마음속에는 큰북의 짧고 묵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나를 향해 있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교실 안의 분위기.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시선. 비웃는듯한 눈빛. 빨리 이 교실 안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선생님의 표정.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패라는 감정을 느꼈다. 책가방을 메고 복도를 걸어 나와 운동장에서 학교 교문까지 걷는 동안 나는 지금 나에게 벌어진 일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매번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받던 내가. 나의 노래를 듣고 행복해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버티고 버텼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길가던 아줌마가 보든 말든. 자전거를 타고 가시던 할아버지가 보든 말든. 나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실패라는 감정에 그대로 나를 내맡기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흐릿하게 처리된 배경이 되었다. 오직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울고 있는 나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울면서 걷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다행이었는지 집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메고 있던 가방을 아무 데나 내던져 놓고 아랫목에 깔려 있던 빨간색 바탕에 커다란 장미꽃이 그려진 담요를 덮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간절했기에. 너무나 좋아했기에. 너무나 기대했기에. 합창부에서 노래를 할 수 없다는 현실은 어린 나이에 나에게 너무나 큰 실패라는 감정을 심어주었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실패를 하면서 살아가겠지만 아마도 이번 합창부 탈락은 내 인생의 다섯 손가락에 들만한 실패의 경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한바탕 울고 난 뒤 담요 속에서 나오고 보니 배가 너무 고파왔다. 부엌문을 열고 보니 보슬보슬 잘 익은 감자가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감자와 찬장 속 반찬통에 넣어 있던 김치를 꺼내 우거적 우 거적 먹기 시작했다. 슬프지만 배는 고프고 또 감자와 김치는 너무 맛있었다.
내가 합창부는 할 수 없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하고. 듣는 걸 좋아하는 마음은 변화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합창부에 도전해 보겠다는 아주 작은 결심의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합창부에 또다시 지원했지만 탈락. 그다음 해에도 탈락. 처음보다는 실패에 대한 감정에 내 마음을 내맡기지는 않았다. 담담해졌다고 해야 하나. 실패에 익숙해졌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뭐 처음 합창부에서 탈락했던 순간만큼 울지도 않았고 쿵하는 큰북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었는지. 그런지 모르겠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보다 한 발짝씩 앞서 걸어가고 있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풍금소리의 박자에 나의 박자가 맞추어지고. 진성으로만 부르던 나의 목소리가 가성의 목소리에 더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실패 속에서 조금씩 해답을 찾아가고 성장하고 있었다.
노래를 아주 잘했던. 초등학교 내내 합창부였던 혜진이에게 주말마다 노래를 함께 부르며 나의 노래도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었다. 노래가 하고 싶었기에. 합창부에 들어가고 싶었기에. 나는 어떻게든 했다. 그리고 나는 6학년 여름 무렵에 교회의 성가대 합창부에 들어와 달라는 어느 한 집사님의 부탁으로 교회에서 주일마다 성가대 활동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걸 좋아한다. 30대가 되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약간의 음치였다. 대학에서 음악 전공을 했던 남편이 나의 노래를 듣고 하는 말. " 음치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참 애매한 경계선에 걸터앉아 있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합창부에 계속 탈락되었던 것도. 어쩌면 지금보다 더 심한 음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초등학교 지휘 선생님 말고는 나의 노래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했던 사람들이 없었기에 나는 내가 음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합창부 인원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는 것을 보면 정말 심한 음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노래가 너무 좋았고. 너무 하고 싶었기에 노래 잘하는 친구에게 노래를 배우고. 함께 부르면서 나의 심한 음치가 지금은 애매한 경계선에 놓여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음치인 줄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뒤돌아보니 그때보다 나는 많이 앞서서 걷고 있었다. 첫 번째 실패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도 듣지도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아주 심한 음치로 살아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노래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긴 체 말이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하다 보면 분명 어제보다는 더 가고자 하는 그곳에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음치였던 내가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