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버려져 있던 아이였다. 날카로운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지만 미세한 틈으로 말랑말랑한 피부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긴 속눈썹이 보였다. 왼손을 뻗어 쓰레기 더미 위에 있던 아이를 들어 올리니 가려졌던 얼굴이 보이고 감았던 눈을 번쩍 뜨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 그 아이를 다시 쓰레기 더미로 던져 버리고 한 발짝 물러났다. 새콤한 호기심이 많았던 여중생이었던 나는 다시 한번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쳐다보니 긴 속눈썹이 볼까지 내려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누우면 눈을 감고. 두 손을 잡고 세우면 눈을 뜨는 신기하고 놀라운 아이였다. 모습은 사나운 사탄의 인형처럼 생겼지만 이상한 재롱에 이끌려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 왔다. 따뜻한 물에 더러워진 몸을 씻기고 린스를 헝클어진 머리에 마구 쏟아부었다. 세상의 온갖 냄새들이 묻어 있던 아이의 옷은 비눗물 통에 빠트려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 이름은 미미로 정했다. 바비인형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아이가 미미가 아닌가. 나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14살 사춘기 여중생. 세상의 모든 공기가 날카로운 날을 세워 나를 공격하는 날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미미에게 나의 마음을 속삭였다. "울퉁불퉁 울부짖는 쇳소리가 들리지 않니?" 바닥 끝까지 숨고 싶은 날에도.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고 싶은 날에도. 나는 늘 미미에게 조잘거렸다. 나의 이야기를 덤덤히 들어주는 미미가 듬직했다. 시커먼 어둠 속에 보이지 않던 나의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꺼내 놓았다.
동생의 눈에도. 단짝 친구의 눈에도. 미미와 매일 조잘대고 있는 나의 모습이 정상이 아니라고 했다. 미쳤단다. 나이가 몇 살인데. 옛날 같았으면 시집을 갈 나이에 인형이랑 대화를 하고 있다니.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나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나도 미미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상했다.
더 당당해졌다. 종이가방에 미미를 넣어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미미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책가방이 걸려 있어야 할 자리에 미미가 들어있는 종이가방을 걸어 놓았다. 국어 선생님이 수업 중에 종이가방에 든 미미의 정체를 알고 화들짝 놀라셨다. "다시는 학교에 이런 거 가지고 오지 마!" 국어 선생님의 어조는 단호했다.
매점에 다녀온 잠깐의 시간. 종이가방에 든 미미가 사라졌다. 종이가방 통째로 사라졌다. 수업종이 울렸지만 나는 책상에 엎드려 썩은 비명소리가 솟구쳐 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단짝 친구에게 빨리 내놓으라고 윽박 지르기도 하고, 짖꿎은 남자아이들의 장난이라 생각해 빨리 가져오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결국 어디에서도.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미미가 없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멋대로 살았다. 공부도. 학교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 공부를 1~2등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10등 안에 드는 그냥저냥 중상위권 학생이었던 나는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나의 인생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던 중학교 2학년. 어쩌면 사람에게 말할 수 없었던 깊은 마음속 이야기를 인형이라는 말 못 하는 물건에 이야기 함으로써 천둥의 질긴 파열음이 들리는 사춘기를 견뎌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불안한 감정과 두려운 감정을 배설하는 상대가 사라지면서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나의 마음속에 쌓여 병들고 곪아가고 있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틀리다고만 말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오만함.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 인 것 같은 생각.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
중학생이 인형과 말한다고 아끼는 인형을 허락도 없이 버려버리는 어른의 생각.
나는 그날 이후로 인형에게도. 사람에게도 나의 마음을 모두 주지 못한다. 믿지 못하는 두려움이 와르르 무너진 나의 마음속에 케케묵은 거친 돌처럼 단단히 굳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