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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시 Sep 15. 2021

사람됨 공부

퇴계의 사람 공부


이이가 지은 <퇴계 선생 유사>

선생은 성품과 도량이 따뜻하고 순수하기가 옥과 같았다. 성리의 학문에 뜻을 두어 젊어서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았다.

... 옷과 음식은 겨우 족했고 담박한 맛을 좋아했으며 권세와 이익의 호화로움을 뜬구름처럼 보았다. 말년에 도산에 서당을 지으니, 자못 선비가 숨어 사는 곳다운 풍취가 있었다...... <퇴계집>



옛 친구와 오랜만에 소식을 전했다.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이것저것 서로의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질문을 하고 답했다. 그 친구는 대학 졸업 후 고향을 떠나 대기업에 입사를 해 몇 해 전까지 여느 사람들처럼 그리 지냈다고 했다. 선생님이 꿈이었던 친구가 회사원이 되었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치열하게 경쟁의 결과로 얻은 대기업을 퇴사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 가 사과농사와 배 농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친구의 결정에 "잘했어! 마음 편한 게 최고야!"라고 친구의 선택을 지지했지만. 나의 마음의 소리는 '미쳤네. 미쳤어. 그 좋은 회사를...'라고 친구의 결정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와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나 요즘 너무 즐겁다!"라는 친구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나의 마음의 소리가 부끄러워질만큼 친구는 지금의 삶에 만족해하며 살고 있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집에서 살아야만 행복하다는 편견 속에 갇혀 있던 나. 내가 생각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불행을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편견이다'  퇴계 선생이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고, 호화로운 생활을 멀리하며 지낸 그의 검소한 삶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훗날 우리에게도 큰 깨달음으로. 삶의 지혜로 우리들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어울리며 벼슬살이를 하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경전을 읽고 도를 음미하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도연명과 퇴계만이 아니라 동야의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삶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삶의 즐거움은 사람마다 각기 자유롭다. 어떤 것이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의 눈에서 보면 퇴계 선생이 살아온 공간은 그 시절 사람들이 보기에도 힘든 공간이었음에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을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도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이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자연인들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눈에는 한없이 불편하고 외로워 보이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일평생 제일 행복한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삶의 즐거움이란? 내가 행복하면 어떠한 삶이든 그것이 정답이다.


퇴계에게 공부란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공부를 잊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빨리 성과를 얻고자 인위적으로 해서도 안된다. 잊지 말고 꾸준히 자연스럽게 해 나갈 때 성취도 거둘 수 있고 공부의 참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공부는 한평생 해야 하는 것이다. 배움이 끝이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더 크게 느끼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고 새로운 기기들의 사용방법들을 익히고,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해 가기 위해서는 공부는 꾸준히 해야 한다. 세상이 변한 걸 인정하지 않고 옛 사고에 갇혀 살다 보면 현시대를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성장하고 편안한 삶과 마주 할 수 있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역시 타고난 천명인 본성을 온전히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유학에서 인간의 본성은 선하며, 그 본성을 온전히 실현한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그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 대한 말은 많은 서양의 철학자와 동양의 철학자들의 말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들도 알만큼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대로 살아가라"라는 말은 일맥상통한다. 톨스토이도. 헤르만 헤세도. '나는 누구인가?'를 끝없이 고뇌하며 나를 알아가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근심 가운데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가운데 근심 있네

자연의 조화를 타고 다하여 돌아가니

더 이상 구할 것이 무엇이랴


퇴계는 학자가 성인과 현인의 경전을 열심히 읽는데도 도를 알게 되어 성인이 되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학문을 통해 마음의 선한 단서를 열어 자기 마음을 분발시킴이 없기 때문이라고 확언한다.


독서의 양이 중요한 것보다 하나의 책을 읽더라도 그 책 속에서 우리가 얻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눈으로 읽고 마음을 열어 몸으로 실천하는 독서라면 한 권의 독서라도 그렇지 않은 천권의 독서보다 낫다.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는 이유 중 하나도 다시 한번 나의 책 속의 지혜를 마음에 담기 위함이다. 한번 읽고 책을 덮어 버리면 다음날 그 책의 내용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다. 마음에 담은 책 속의 지혜들은 그렇게 차곡차곡 마음속에 쌓여 나의 고민들에. 걱정들에 대답한다.


배우는 사람이 마땅히 그러한 뜻을 이해하고 그 말을 가려서 같은 것은 취하고 다른 것은 버린다면, 그 또한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한다.


사람됨의 공부, 사람 완성의 공부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반복되는 삶을 통해 하늘의 이치를 체득하고 확충하여 천리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퇴계는 세속적인 성공보다 휴식과 독서가 있는 삶, 이웃과 정을 나누는 소박한 삶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퇴계의 사람 공부 책을 읽으면서 퇴계의 삶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생겼다. 자연이 주는 편안한 풍광 속에 휴식과 독서가 읽는 삶을 살았을 퇴계 선생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니 나 또한 그런 삶이라도 괜찮치 않을까 생각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라고. 퇴계 선생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부터라도. 마음을 다독여 보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나의 욕심이 자연스레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산수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맑고 높음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맑은 것은 스스로 맑고, 높은 것은 스스로 높다. 사람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산과 물은 스스로 한탄하지 않는데 나는 한탄하니, 내가 어리석다.


나의 배려. 나의 수고스러움. 나의 희생에 알아주기 바랐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서운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내 덕분'이라고 한마디 말해주기를 바랐다. 맑은 것은 스스로 맑고, 높은 것은 스스로 높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나'는 그대로인데.. 나의 어리석음 깨닫게 해 준 문장이었다. 여러 번 다시 읽고 또 읽으면서 마음속에 담아 놓았다.


잠시 한쪽 구석에 두었다가 시일이 지난 후에 다시 그 문제를 꺼내어 마음을 비우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그렇게 할 뿐이다.


문제가 생기면 억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잠시 마음을 비우고 곰곰이 생각해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기다렸다는 퇴계 선생. 문제가 생기면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걱정과 문제에 사로 잡혀 있는 게 현실이다.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걱정의 끈을 놓지 못했다. 퇴계 선생의 끝없는 사람 공부가 그를 높은 경지까지 오르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퇴계 이황 선생의 사람됨 공부는 읽는 내내 마음이 편안함을 느꼈다.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았고, 마음에 울림을 주는 문장은 여러 번 다시 읽고 밑줄을 그으며 마음에 담았다. 당장 내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담아 놓은 퇴계 이황 선생의 말들을 생각하고 되뇌며 흔들리는 나의 삶을 바라 잡을 수 있는 지지대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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