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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문 Mar 21. 2019

‘건국’ 정신은 누가 계승하는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즈음하여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열악했다. 일제는 여전히 강했고, 국제적으로 임시정부의 우군은 몇 없다.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독립이라는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에는 당면의 과제가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어찌 되었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열심히 달렸고, 결국 해방을 맞이 했다. 해방된 조국은 어수선했고, 새로운 점령자들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되기 직전에 발표된 헌법에서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규정하여 그 정통성은 인정받았다. 이것은 현행 헌법에까지 들어가 있는 하나의 당연한 원칙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시 부각하는 일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은 상식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에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1948 건국론’ 자들이 바로 그것이다.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뿐 대한민국은 1948년 제헌 헌법 이래 건국된 것이므로 올해를 건국 100주년이라고 하는 것은 틀렸다고 한다. 실제로 국가의 3요소인, 영토와 국민 그리고 주권이 명확하게 나타내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로 나타난 것이 1948년이므로 이 주장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제국에서 민국으로 이른바 공화제로의 전환을 명확히 한 점, 독립운동의 구심점 중 하나였다는 사실, 제헌헌법부터 꾸준히 그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정통성을 주장해 온 점 등을 비추어 보았을 때 1919년 건국론에게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어찌 되었든 적어도 헌법으로 보았을 때,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건국을 기미년이라고 규정했으므로 그런 입장에서 정부가 ‘건국 100주년’이라고 규정한 것은 크게 이의를 제기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실 이 문제는 역사학에서 있어의 논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의미가 크다. 1948 건국론은 주로 이승만 국부론을 세트로 내세우는 경향이 있고, 1919 건국론은 이에 대항하는 성격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를 보는 시선이란 모두 정치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하지만, 유독 이 사안에 대해서는 크게 분열되어 있다. 각 정파는 건국 기점을 가지고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옹호하고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마치 그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국가 이상향을 구축하는 다른 건국 정신을 담은 것처럼 이야기되고는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다. 양측의 건국 정신이라는 것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을 보자.


대산업기관의 공구와 시설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수리, 임업 소택과 수상, 공중의 운수사업과 은행,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 공, 상, 기업과 성시, 공업구역의 공용적 주요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 중소기업은 사영으로 함.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까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사영을 특허하거나 또는 그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전자는 1941년 발표된 대한민국 건국강령이며, 후자는 1948년 제헌헌법 일부다. 이것을 보면 경제적 자유를 중시한다는 ‘1948 건국론’ 자들은 기겁을 할지 모른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적 경제질서를 가지고 태어났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만, 그 건국 선언 헌법에서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이 주도했다고 해서 제헌헌법이 우파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1919년 건국론’ 자들도 제헌헌법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제헌헌법은 적어도 경제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역대 헌법 중 가장 급진적이었다. 다음과 같은 조항도 있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근로자의 이익 균점권’이라고 불리는 이 헌법상의 권리는 지금 봐도 놀랍다. 이제야 기업 경영에 노동자가 참여하는 방안이 조금씩 확대되고 있는 2019년에, 1948년 헌법은 대놓고 근로자가 이익의 분배를 균점 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일각에서 제헌헌법을 ‘오래된 미래’라고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정도만 보아도 우리는 ‘1919년 건국론’과 ‘1948 건국론’ 각자의 ‘건국정신’의 실제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각자가 생각하는 건국정신은 차이가 있겠으나,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각자 주장하는 건국 정신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그런가? 노동자는 산업재해로 수시로 죽어가고, 책임지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삶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노력이 강조된다. 부패한 정치권력을 갈아 치웠지만, 새로 들어선 권력에 대한 기대는 이미 식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건국절 논쟁은 우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1919 건국론’이든, ‘1948 건국론’이든 그 근거가 된 문서들이 선언한 건국이념을 제대로 실현하자고 주장하거나 실행에 옮기는 세력은 지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3.1 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시기에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도대체 당신들이 말하는 건국 정신은 언제 실현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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