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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문 Mar 22. 2019

잊혀진 이름들에 대하여

또 다른 희생자들

어제 일이다. 모 당에서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에서 희생당한 장병 당한 장병들을 추모한다는 현수막을 게시한 것을 보았다. 항상 이 시기만 되면 나오는 현수막이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여전히 전쟁의 중심에서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더욱이 관심병사인 출신인 나로서는 부채감도 상당한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생각도 한다. 분명 국가를 위해 전장에서 희생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것은 백번이고 옳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그것만 집중한다는 느낌이 있다. 무슨 말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그것을 추모해야지 그럼 뭐가 더 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말들의 취지를 격렬히 이해한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추모하지 못했던, 다른 장병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의미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름조차 불리지 않고, 어떤 정치인도 매년 기억해주지 않는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군내 가혹행위 사망자 및 자살자들이다. 군대의 책임으로, 국가의 역할 부재로 사망한 그들이지만 아무도 그들을 추모해주지 않는다. 어떤 진영에서는 군대를 비판하기 위해서 윤일병 등을 거론하지만, 그들조차도 필요를 제외하고는 그들을 잘 추모해주지 않는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대만처럼 정부수반, 그러니까 군 통수권자가 가서 가혹행위 사망자 유족들을 방문해주는 정도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국가가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호명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분명 그들도 나라를 위해 군대에 끌려갔다가, 죽은 이들이다. 내부에서 죽었다고, 혹은 참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덜 추모를 받을 이유는 없다.

천안함 46 용사의 죽음이 고귀하다면, 윤일병의 죽음도 고귀한 희생이다. 전자는 외부의 적과 싸웠다면, 후자의 내부의 적과 싸웠을 뿐이다. 그 어떤 입장에서도 그렇게 죽어간 장병들을 추모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애국의 극단에서 보아도, 우리 군대의 부조리를 밝혀냈고 그것에 희생당했다면, 애국자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휴전선의 긴장처럼, 이러한 사태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끊임없이 장병들은 내부의 전쟁에서 희생당하고 순국하고 있다.  

좌우를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어느 관점에서든지 이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애국이든, 국가 폭력의 희생자이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이름이 잊혀지고 있는 상황을 씁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 국군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내부의 전투에서 배우지 못한 군대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희생당한 전우를 선별해서 기리는 군대에 무슨 전우애가 있겠는가?

서해 수호의 날 4주년에 나는 서해를 수호하다 장렬히 전사한 장병들을 추모하면서, 동시에 주목받지 못하고 사람들이 이름 석자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내부의 희생자들을 생각한다. 모두가 전쟁이라는 야만의 피해자이며, 국가와 군대를 위해 희생한 그런 사람들이었다고 감히 이야기한다. 언젠가는 이 두 존재 모두 합당하게 대우를 받는 날이 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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