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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문 May 01. 2019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의 오소마츠

레이와 시대 단상

둘째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기 좋아한다. 그래서 가끔 나한테도 좋은 작품을 여러 개 소개해 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오소마츠 상(おそ松さん)이다. 이 만화는 오소마츠 군(おそ松くん)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으로, 마츠노 가(家)의 여섯 쌍둥이의 일상을 다룬 개그 만화다. 오소마츠 상을 처음 보고 나서 꽤 괜찮기에, 원작인 오소마츠 군(한국판 : 육家네 6 쌍둥이)도 찾아서 보았는데, 역시 개그가 일품이었다. 다만 80년대 작품이라 2010년대 작품인 오소마츠 상보다는 식상한 느낌이었다. 식상해도, 그런 만화들을 한국에서 재방영해주는 판으로 시청하면서 자라온 나로서는 추억에 빠지면서 충분히 즐거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소마츠 군과 오소마츠 상이 어떤 차이가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둘 다 웃기는 만화지만, 그 속에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조금 달랐다. 오소마츠 군은 일본에서 쇼와 시대(昭和 時代, 1926~1989)에 방영된 작품이고, 오소마츠 상은 헤이세이 시대(平城 時代, 1989~2019)에 방영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만화라고 할지라도 시청자가 받는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

오소마츠 군이 자라서 오소마츠 상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쇼와 시대 개그는 이제 옛날 거라고!’라고 외치면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걱정한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잠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오소마츠 상 시리즈를 처음 보더라도, 과거 시대의 추억을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화려했던 만화 세계 속에서 미소 짓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펼쳐질 장면들 앞에 웃을 준비를 한다. 또한 자신도, 만화도 더 성장하게 되었음에 내심 뿌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우리 세대의 절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오소마츠 상의 여섯 쌍둥이는 사토리 세대(さとり 世代)는 아니지만, 그런 요소를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취업에 상당히 달관하며, 사회에 스며드는 듯, 스며들지 않는 듯, 애매하게 녹아내리고 있다. 계속 부모님 옆에 붙어살고 있지만, 미래가 잘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즐겁고, 나름대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누가 보기에는 그저 한심한 니트족일 뿐이다. 그러나 도대체 니트는 왜 생기는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묶어 왜 니트족이라고 했는가. 그런 걸 생각해보면 캐릭터들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쇼와 시대와 헤이세이 시대의 여섯 쌍둥이들을 비교해보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더 풍족한 삶을 살고 있으며, 반세기 넘도록 평화로운 세상 안에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다른 전쟁들(취업 등)에서 패배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신음하고 있다. 아베 노믹스로 취업률이 아무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이미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더 이상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시대를 살고 싶고, 그렇게 하고 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들을 투영한 것이 헤이세이의 오소마츠 상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레이와 시대가(令和 時代, 2019~) 시작되었다. 헤이세이도 종말을 고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여러 기대에 부풀어 있다는 소식도 접한다. 레이와를 맞이하는 오소마츠에게도 그럴까? 그에게도 영광의 새 시대가 될까? 아베 정부는 올림픽과 엑스포를 개최하는 등, 쇼와의 부흥을 어떻게든 되살리려는 모양새이지만 헤이세이의 유산은 무겁다. 달관하는 젊은 사람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계속해서 달관할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 결국 사회에 있는 여러 연결고리를 박살 낼 것이다. 헤이세이 키즈들이 만들어 갈 세상에 영광은 없다. 다만 그 개인이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파괴하는 어떤 힘이 될 뿐이다. 헤이세이 세대의 달관을 이용해 정권을 쥐었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이에 편승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픈 소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뿌린 씨앗의 결실이다. 레이와 시대에서의 변화는 아베의 집무실이 아니라 오소마츠의 다다미방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건 비단 일본을 향한 경고음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사회문제가 돌이 되어 그들을 심해에 던져 놓는 것이라면, 한국의 경우 활화산과 같다. 분노의 산은 계속해서 높아져만 가고, 화산은 끓어오르며 폭발을 준비하고 있다. 이 폭발이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도망간 사람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인해 분노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역으로 나와 세상을 바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본에는 연호가 있어 이것을 ‘레이와’로 부른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그리고 한국의 육가네 쌍둥이의 방에서는 어떻게 사회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이제 그것이 밝혀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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