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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문 Mar 21. 2019

산다는 것

한국에서 게이로 산다는 것

“오빠, 그런데 왜 배경화면에 남자가 있어?”


어린 동생이 천진난만하게 묻는다. 나는 부모님이 들을까 황급히 ‘잘못 봤다.’면서 아이패드 화면을 가린다. 막내는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서는 곧 방을 나간다. 남자가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은 소수일지 모르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여겨지는 시대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실을 가린다. 왜일까? 그건 바로 내가 단순히 남자 아이돌을 덕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로서 그들에게 호감이 있다. 그렇다. 나는 게이다.


게이. 동성애자. 일단 존재 자체는 한국 사회에서도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조금 당혹스러울지 몰라도 ‘있다’는 것 자체가 부정받지는 않는다. 게이는 성소수자 중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성소수자=게이’라는 오류를 범하고는 한다. (기독교의 반동성애 진영에서 동성애자, 특히 게이만 공격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즉 ‘소수자 내 다수파’ 같은 위치를 게이들이 점하고 있다. 그래서 보통 성소수자로서의 이야기들을 찾아보면 ‘게이로서의 경험’이 상당히 잦은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게이로서 산다는 것을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미 많은 이야기가 있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다른 퀴어들의 목소리가 묻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게이에 대한 이상한 편견(게이는 잘생겼다든가의 따위)을 마주할 때마다 괴로움을 느끼면서, 결국 더 다양한 게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느낀다. 게이가 ‘소수자 내 다수파’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사회에서는 ‘소수’ 그 자체다. 아무리 많은 게이들이 이야기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그대로라면, 여러 걱정이 있지만 내가 한 마디라도 더 해 그것을 타파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한국에서’ ‘게이로’ ‘산다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적 지향을 개방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나는 늘 연극을 하고 살아간다. 그것도 가면극이다. 나는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남자들 사이에서 어떤 여성상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고, 그에 대한 일종의 모범답안을 준비해야 할 의무를 부과받는다. 내가 실제로 어떤 여성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척’을 해야 한다. 그것은 심히 역겹고 괴로운 일이다. 끊임없이 어떤 끌림을 느끼지 않는 이성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을 사랑한다고 선언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라.


나는 그런 과정 속에서 나라는 인간을 지우고 산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 기존 질서에 편승하여 살아간다는 역겨움에 치를 떨고는 한다. 그나마 지금이 2019년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세계적으로 동성혼이 법제화 추세에 있고, 한국에서는 퀴어 문화 축제가 크게 일어나고 있다. 여전히 존재를 밝힌다는 것은 사회에서 큰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적어도 완전히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2019년임에도, 여전히 장벽은 높다. 성소수자의 사랑을 배척하자는 소리가 국회의원 입에서 나오거나, 군대에서는 그런 이유로 처벌받는 사례가 아직도 현존하며, 동성애라는 ‘문제’는 ‘찬반’의 영역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몸을 숙이며 산다. 퀴어 관련 조직에 있거나 열린 사고를 하는 조직에서만 오로지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다. 평소에는 완벽히 위장막을 치며 살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일들을 10년 동안 꽤 잘 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간혹 화두에 오르는 그들의 호모 포비아적 발언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게이의 섹스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에 관한 발언들을 듣고 있노라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당장이라도 교정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실제로 몇 차례 그런 적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나는 그저 속으로 욕을 하며 넘어갈 뿐이다. 아웃팅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커밍아웃은 이런 이유로 두렵고 용기 있는 시도가 된다. 마치 그것은 냉전 시대 한국에서 ‘내가 공산당 지지자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실제로 어떤 음모를 실행하지 않아도, 합법적인 범위에서 그 운동을 하려고 해도, 남산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야 하지 않던가. 또한 가족에서 분리되고, 사회에서 모든 직위를 박탈당해야 하지 않았던가. 비록 퀴어들, 성소수자들에게 고문이 가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위 ‘빨갱이’들이받아야 하던 탄압이 ‘무지개’로 옮겨온 것은 틀린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상황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다. 연대의 힘으로 겨우 버텨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나는 ‘게이’다. 차은우나 박보검 같은 잘생긴 남자를 갈망하는 게이로 살아간다.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남들처럼 공부와 일을 한다. 가끔 카페에 앉아 글을 쓰며 생각에 잠기며,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저 좋아하는 대상이 ‘이성’이 아니라 ‘동성’ 일뿐이다. 평범한 삶의 연속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나의 그러한 일상들을 다르게 해석하려고 한다. 내게 뭔가 특수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하며, 그들이 생각하는 ‘게이 다움’을 요구하고는 한다.


게이 다움. 그건 대체 뭘까. 이성애자 다움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게이 다움이라는 것도 없다. 좋아하는 대상 하나가 달라졌다고 해서 어떤 다움이 생길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오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어떤 게이상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잘 꾸미고, 끼를 부린다는 등의 따위의 특성 말이다. 분명 그런 게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성애자에도 여러 유형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게이도 여러 유형이 있다. 어떻게 정형화할 그런 성격의 것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게이 다움’을 이야기하고, 나보고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때 나는 태양왕 루이 14세처럼 근엄하게 ‘내가 곧 게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내가 곧 게이다. 누가 아니라고 이상한 기준을 들고 오든, 게이라고 말하면 탄압을 가하든, 뭐가 되었든 나는 곧 게이다. 한국에서 게이로 살면서 여러 어려운 점이 많지만, 나는 내가 게이라는 사실 자체에 늘 만족한다. 남자를 사랑하고, 갈구하는 멋진 임무를 부여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나의 삶을 여러 편견으로 재단하고 억압하려는 사람들이 그저 우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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