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이 아줌마 둘의 우당탕당 자유여행
함께 자유여행을 하기로 의기투합하고 우리가 갈 곳이 정해졌다. 우리가 아무리 둘 다 무계획형 인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외향인의 뒤를 쫄쫄 따라다니는 내향인이지만, 대략적인 계획은 세워야 여행지에서 허둥거리지 않고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친구는 아직 퇴사 전이었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직장에 매어 있어야 하는지라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내가 자청해서 일정을 짜고 가고 싶은 곳과 교통편,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검색해서 공유했다. 그러면 친구가 보고 더 괜찮은 곳이나 다른 방법, 추가할 일정 등을 보충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나는 공항에 도착해서 뭘 해야 하는지 순서조차 가물가물해서 공항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들을 번호 순서대로 적어가며 미리 연습하기도 했다. 체크인을 먼저 하고 다음에 출국심사를 하고 면세구역으로 무사히 넘어가면 비행기를 탈 구역으로 이동한다. 셀프체크인을 완료한 후의 감격이라니. 빨리빨리! 사진 찍어. 우리는 출력된 비행기표를 들고 셀프체크인 기기 앞에서 인증 사진까지 남겼다. 뭐야, 너무 쉽잖아. 괜히 쫄았네.
촌티 좔좔 흐르는 우리의 모습을 목격하신 분 계시다면 부디 기억에서 잊어주소서.
여행 전, 친구는 딸로부터 들은 조언을 전했다. 엄마와 딸 사이가 완벽하게 바뀐 거 아니냐 내가 놀렸던 것처럼 친구의 딸은 자신의 엄마를 마치 물가에 내놓은 ‘딸’처럼 걱정했다. 여행은 원래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속상해하지 말고.
그렇지. 여행은 원래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지, 암요 그렇고 말고요.
그런데 설마 그게 아니라 여행은 원래 처음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거였던가. 아니면 애초에 소심이 아줌마 둘이서 떠난
우당탕탕 첫 자유 여행이라고 이 여행의 주제를 정해버렸기 때문인가.
여행이 시작되고 계획은 처음부터 틀어졌다. 탑승까지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초보가 아닌 것처럼 태연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부터 우리는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입국신고서와 세관신고서 작성에서부터. 우리는 빠른 입국을 위해 작성할 내용을 미리 적어오는 계획성 있는 인간들 아니었던가. 결국 우리는 가장 늦게 출국장을 빠져나온 두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 전용 셔틀버스까지 전력질주했다. 그러니까 내가 미리 계획했던 일정표의 ‘우아하게 출국장 빠져나오기’는 실패.
3박 4일 일정의 첫날, 친구는 총 여섯 가지의 사고를 쳤는데, 그 밤 숙소에서 내가 내민 공책에 그녀는 순순히 진술서를 작성했다. 되게 많은 것 같은데 여섯 개밖에 안 되는 게 이상해서 둘이 갸우뚱했다. 하이라이트는 한 벌 뿐인 겉옷을 마쓰야마 공항 어딘가에 두고 표표히 빠져나왔다는 것, 우리나라 초봄 날씨라던 마쓰야마인데 하필 우리가 여행을 한 시기에 추위가 찾아왔고 폭설과 바람이 불었고 체감기온은 영하 6도였다(다음날 가지고 온 모든 옷을 껴입고 뚠뚠이로 변신해서 돌아다니던 친구의 사진은 두고두고 그녀의 흑역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겐 두고두고 그녀를 놀려먹을 일화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실망과 좌절과 상심을 안긴 것은 2일째 일정이었다. 나는 2일째 일정을 짜며 영혼까지 갈아 넣었다. 우치코와 오즈와 시모나다를 어떻게 이동하고 얼마나 머물 것인가, 계획을 세우고 변경하고 변경하며 이미 그곳을 여러 번 다녀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기차 좋아하고 기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 좋아하는 우리 여행의 하이라이트였으며 우리의 인생샷은 모두 이곳에서 건질 것이라 기대했었다.
여행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보며 공부한 대로 배낭에 간식까지 야무지게 챙기고, 드로잉 북과 책, 우산까지 넣어서 우리는 마쓰야먀 역까지 씩씩하게 걸었다. 비록 이것저것 쑤셔 넣은 가방 때문에 츨발 직후부터 어깨가 아팠지만, 한적한 시골에서 우리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마쓰야마 역과 마쓰야마시 역을 헷갈리지 말라는 조언도 잊지 않고 제대로 잘 찾아갔더랬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일본에는 몇십 년만의 폭설이 내렸으며 더 내릴 예정이며 그로 인해 모든 기차는 운행을 중지했다는 말을 역무원으로부터 들었다. 영어와 일어와 손짓과 얼굴 표정으로 나눈 대화로 우리가 얻은 정보다.
나는 고즈넉한 우치코와 오즈에 가고 싶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중에서 치히로와 가오나시가 물 위를 기차를 타고 가는, 나의 최애이기도 한 장면의 모티브가 된 시모나다에 반드시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일몰을 보고 싶었다. 시모나다는 2일 차와 3일 차 두 번 갈 예정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설렜다. 기차를 탈 수 없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오전 10시, 낯선 곳의 낯선 기차역에서 그만 얼어붙어버렸다.
마쓰야마에서의 마지막 밤, 각자의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우리는 여행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다. 둘이 격하게 공감한 것은 ‘어쩜 완벽하게 처음 계획과 틀어질 수가 있나’이다.
그래서 여행이 실패냐 하면 절대 아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았고, 어설프지만 새로운 시도를 했고, 그 쉽다는 구글맵을 보면서도 헤맸지만 결국 길을 찾았다. 멈춰버린 기차 앞에서 당황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았고 결과적으로 그날도 그다음 날도 잘 놀고 잘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헤매지 않았다. 구글맵을 켜지 않고 숙소를 향해 자연스럽게 걸었다, 숙소를 가운데 두고 어느 쪽으로 가면 마쓰야마 역인지, 어느 쪽으로 가면 편의점이 있고 상점가가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유명하다는 맛집 앞에 줄 서서 먹지 않고 우연히 발견했던 식당은 입에 맞았고, 평소 우동을 먹지 않는다던 친구는 우동을 두 번 먹었다.
폭풍 검색해서 알아본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정보지만 그대로 따라 했다면 이만큼 의미 있는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계획과 완벽하게 틀어진 이번 여행을 통해 다시 깨닫는다. 계획대로 일정을 마치고 났어도 이런 성취감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까. 계획했던 일정은 다른 이들의 발자국 그대로 따라 딛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 온 기념품을 사고 그들이 갔던 음식점 앞에 줄을 서고 그들이 관람한 관광지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틀어졌던 여행이었기에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닌 우리만의 길을 찾아 산책할 수 있었다.
어쩐지 마음속에 작은 용기가 들어앉은 것만 같았다. 이제 나는 더 먼 곳에서 길을 잃더라도 새로운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 길을 처음 걷는 산책자일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