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떠났던 가장 먼바다
배를 타고 태평양 바다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서산항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일주일 동안 항해하며 일본과 대만의 도시 세 곳을 여행하고, 부산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서울에서 서산까지 이동해야 했고, 도착한 후 부산에서 서울까지 돌아와야 하니 여행 일정은 더 길었다.
함께 여행하고 싶은 사람을 곰곰이 생각했다.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몇 명 떠올랐지만, 일주일 이상 휴가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업주부에게도 어려웠고, 직장을 다니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동행은 아들이었다.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는 스물두 살의 아들.
그 긴 시간 동안, 한정된 공간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위험 요소들이 있는 배 안에서 내가 안전하게 아이를 보호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단조로운 시간을 아들은 답답해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 난간에 매달리는 아찔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혼자 고민을 거듭했다. 내게 주어진 행운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다. 평생 한 번을 경험할까 말까 한 크루즈여행을 막상 포기하려니 아쉽고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학교 선생님께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들과 함께 해외로 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조언을 구했다. 선생님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고, 그 말에 용기를 냈고, 최종적으로 동행인으로 아들의 이름을 올렸다. 여권을 제출하고 개인 정보를 제공하고 여행자 보험까지 들었으니, 이젠 배를 타고 모험을 떠나는 일만 남았다.
아들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나의 약점이었다. 감추고 싶고 드러내고 싶어서 마음속 가장 구석에 숨겨놓은 진실. 대면하지 못하고 회피했던 시절, 마음은 늘 지옥이었다. 내가 인정하지 못하니 아들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벽에 머리를 박으며 괴로워했고 아들 역시 그러했다. 내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런 고통을 받나, 한탄했고 아들도 자신은 왜 이렇게 태어났느냐, 내게 물었다. 나는 아들을 보통의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고, 아들 또한 보통의 아이처럼 보이기를 원했고, 비장애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간절히 원했다.
적어도 튀지는 않게 나는 애썼다. 나중에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고, 나 자신과 아들을 지옥 속에 가두고 있던 시간들이 후회스러웠지만, 당시에는 다른 방법을 몰랐다. 한 번 가르칠 것을 만 번 가르쳐 한글을 깨치고, 또 만 번을 가르쳐 구구단을 암기시켰다.
예쁘고 그림 잘 그리는 큰딸, 영리해서 교내, 교외에서 상을 자주 받은 작은딸을 자랑하고, 사진을 보여주었으나,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들에 대해 묻는 질문엔 수루 뭉실 애매하게 답변하고 재빠르게 다른 화제로 돌렸다.
어느 날 친구의 오피스텔에 놀러 가서 배달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문득 던진 친구의 질문.
그런데 너는 왜 아들 이야기는 하지 않아?
오래된 친구였다. 아들 돌잔치에도 찾아와 줬던 가까운 친구였다. 나는 그런 친구에게조차 하지 못했던 진실을 그때 비로소 털어놓았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핑계는 또 다른 핑계를 만들고, 감춘 진실은 점점 커지고 벅차고 마침내 가슴을 압박한다. 감당 못할 무게에 통증을 느낀다. 내가 만든 거짓은 계속 타당하고 수긍할만한 살을 덧대어 점점 커진다. 내가 한 허구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새겨두었다가 가상현실 속 아들의 인생에 대해 그럴듯한 전개를 만들어내야 한다.
원래 하던 대로 새로운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주제로 대화를 전환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지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정한 친구에게 미안했고, 숨기기에 급급했던 아들에게 미안했다. 대외적인 내 인생에서 아들은 투명인간이었다.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존재 그대로의 아들 이야기를 했다. 하다 보니 덤덤해졌고, 그 긴 이야기를 듣는 친구 역시 그랬다. 이야기를 다 마치고 조금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내게 분명 불행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찔리면 아픈 부분이다. 그런데 나 이외의 누가 찌른단 말인가. 결국 가장 깊게 사정없이 찌르고 할퀸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누구도 내 불행을 찌르지 않았다. 상처를 쑤시고 고통을 주는 이가 있다면 그는 내 사람이 아니다. 그걸 알아채면 등을 돌리면 된다.
떠나는 날이 확정되고, 유의해야 할 사항을 아들에게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배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특히 조심해야 하는 점은 무엇인지, 단체생활에서 어떤 행동이 남에게 피해가 되는지, 혹시 엄마를 잃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 그럼에도 막상 떠나는 날까지도 우리가 이 모험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이제 일주일 동안, 나는 아들의 유일한 보호자로서 아들의 안전과 무사함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더군다나 아들은 신장이 177, 체중이 70 중반 대, 하루에 삼만 보는 거뜬히 걷는 체력을 가진 20대 초반 성인 남성이다. 내 키는 아들의 어깨에도 못 미친다.
3000명이 넘는 승객들이 출국심사를 위해 줄을 서서 차례대로 선내로 들어가는 지루한 시간들. 오키나와와 미야코지마, 대륭까지 세 번의 입출국 심사. 많은 인원이 한 배에서 일주일을 생활하는 건, 그만큼 기다림의 순간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 일들을 아들은 잘 해냈다. 모르는 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저녁 디너 시간에도 의젓했다. 차례대로 나오는 정찬 요리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 아들은 먹고 싶은 것을 선택했고, 우린 식사 때마다 맥주도 한 잔씩 마셨다. 부부, 친구들, 가족들, 여행의 동행은 다들 제각각이었고 엄마와 아들 둘이 온 건 우리밖에 없었다. 다 큰 아들과 엄마의 여행을 함께 앉아 식사를 하던 다른 이들은 신기해했다.
기항지에서의 짧은 여정도 그랬다. 앞서 걷다가 한 번씩 뒤를 돌아 나를 확인했다. 인파에 휩쓸려 다닌 대륭의 재래시장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잃지 않았다. 지도 앱을 켜지 않고 우리는 길을 걸었고, 상점에 들어가 옷을 구경하거나 편의점에서 초코바나 콜라를 샀다. 골목 사이를 걸어 다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면 정박한 배를 향해 되돌아갔다.
우리는 바다를 실컷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보았다. 뜨는 해와 지는 해를 실컷 보았다. 마침내 하늘과 바다의 경계조차 없는 검은 어둠도 응시했다. 가도 가도 온통 물이었다.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하늘과 바다뿐이었다. 긴 시간, 항해하다 정박할 항구에 도착하면 눈앞에 펼쳐진 산과 나무와 건물과 사람 사는 일상의 풍경들이 비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햇볕 따듯한 갑판 위에서 나른하게 졸기도 했고, 지루해진 아들은 배를 한 바퀴, 두 바퀴 혼자 걸었다. 아들은 한참 배 안을 돌아다니다 피곤해지면 13층의 갑판에서 1층에 있는 숙소까지 혼자 쉬러 가기도 했다.
처음엔 걱정했는데 나중에는 걱정하지 않았다. 혹시 난간에 매달렸다가 바다로 떨어지면 어쩌나 했던 떠나오기 전의 걱정도 털어버렸다.
그건 내가 가장 먼바다로 떠나 본 생애 최초의 경험이었다. 스물두 살 아들에게도 그 바다는 가장 먼바다였다. 아들과 내가 함께 가장 멀리 떠나본 세계였다. 내가 알던 세계가 그리고 아들이 알던 세계가 와락 넓어진 사실 앞에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지막 밤에는 파도가 거셌다.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들과 나는 1층 숙소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불 꺼진 숙소에 누우니, 요람처럼 흔들리는 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두렵지 않았고 다음날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일주일쯤 더 바다 위를 항해하고 싶었다. 바다 위에 누워 물결처럼 흔들리고 싶었다. 아득하게 넓고 깊은 하늘과 바다를 대면하니, 나는 얼마나 작은가, 그런 작은 내가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은 걱정은 또 얼마나 작은가.
일주일 동안 내가 본 바다와 그리고 아들과 나눈 대화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졸린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는 지금 너무 행복해, 너도 그러니,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