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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사람의 장례식

by 함지연

지난해 연말, 부고장을 받았다. 나는 지금 이혼소송 중이며, 이혼이 성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내가 받은 부고장의 주인은 곧 전 배우자가 될 아직은 현 배우자의 아버지. 법적으로 나는 그의 며느리이다. 전에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은 있다. 만약 이혼소송 중에, 상대측의 부모상이 닥치면 상주로 참석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이혼이 성립된 후에, 부고장을 알게 되면 인간적인 도리로 참석해야 하나 불참하는 것이 맞나, 그런 생각.


막상 닥치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결정은 내가 해야 하는데 쉽게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주위의 의견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 나는 아무리 가까워도 조언을 구하지 않는 성격이다.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만은 몇몇 사람에게 물었다.

소식을 듣고 나는 쭉 안절부절못했다.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했다. 그래서 물었다. 너라면 어찌하겠느냐고. 역시 어려운 주제였고, 나의 고민을 들은 이들 역시 본인들이라면 어떻게 할 거라고도 쉽게 말하지 못했다.


끼리끼리라는 말은 이럴 때조차 느낄 수 있던 것이 고민을 나누다 보니, 나중에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자녀들의 할아버지이니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 는 비슷한 의견. 심각했던 나는 어이없어서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어쩌면 이렇게 내 친구, 내 가족은 나와 마음이 같은가 하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고,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조문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내게도 이미 있었던 것.

부고 소식은 늦은 오후에 당도했다. 그 밤이나 다음 날이 아니면 갈 수조차 없었다. 발인식에 참석하는 것은 생각조차 없었기에 조문을 해야 한다면 하기 싫은 숙제를 서둘러 마쳐야 했다. 그래서 나는 가고 싶은 않은 장례식장에 갔다. 절만 하고 오자, 마지막이니 인사만 하고 오자. 그런 마음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발이 무거웠고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나는 초대받지 않은 장례식장에 가는 중이다. 장례식장에 가까워질수록 숨이 턱 막히고 떨렸다. 그곳은 내가 미워했던 사람의 장례식. 나를 미워했던 사람의 장례식. 나와 원고와 피고의 관계로 소송 중인 사람과 그의 원가족들과 가깝고 먼 친척들이 모여있는 곳. 그들은 현재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또는 어렴풋이 알 것이다. 아들 셋에 며느리 셋인 고인의 장례식장에 상복을 입은 며느리는 둘 뿐이었으니 설명하지 않아도 눈치챘을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당연히 내 역할이 악인일 것 역시 뻔하다. 그들의 싸늘한 시선이 집중적으로 내게 꽂힐 것이다. 물론 그 정도에 주눅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마음이 무거운 것은 시선 때문은 아니다. 내가 미워하고 나를 미워했던 이의 장례식에 조문을 가는 것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다.

형님, 오셨어요.

손아랫동서가 나를 발견하고 먼저 다가와서 손을 꼭 잡았다. 잘 왔다며 인사를 하는데 그녀의 상복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우리는 이렇게 장례식장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그녀와 손을 잡고 섰던 일이 있다. 그녀의 친정아버지 장례식장에서였다. 나는 그날 두 번째로 상주인 그녀와 마주했다. 상황이 달랐다면 나는 검은 옷을 입고 그녀와 나란히 서서 조문객을 맞았을 터였다. 그곳에 나는 상주가 아니라 조문객으로 왔다는 사실이 새삼 명확해졌다.

이게 뭐야,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야. 나는 정말 오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오지 않을 수도 없었어, 내가 왜 이렇게 되었어.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선 그녀에게 혼란스러운 감정에 대해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영정 사진 속 고인과 마주했다. 최근 몇 년간 왕래가 없던 사람. 노환으로 쇠약해지고 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던 사람. 사진 속의 강하고 서늘하고 고집스러운 얼굴. 꽉 다문 입술에 경직된 표정은 마치 화가 난 사람 같았다. 나는 그가 환하게 웃는 모습은 본 일이 없다.

생전에 그렇게 많은 꽃 속에 파묻혀 본 적이 있었을까. 영정 사진을 둘러싼 꽃송이들. 그 앞에 향을 꽂고 절을 했다. 그나마 명절에 얼굴을 본 것이 5년 전쯤일까. 절을 하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급기야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늦은 밤, 몇 명의 조문객들만 식당 안에 드문드문 앉아있던 장례식장 안에서 나는 엎드린 채로 울었다.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장례식장은 조용해서 내가 크게 우는 소리만 울렸다. 울음이 잦아들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치듯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미운 사람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통곡을 할 거라고는 나 자신도 미처 예상 못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생전의 그는 내게 항상 어려운 사람이었다. 가족이 된 세월이 무색하게 가까워진 적이 없다. 무섭고 주눅 들게 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다음 세대와 그다음 세대에까지 강요했고,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종종 있는 가족 행사에서 가족간의 대화는 없었고, 언제나 같은 주제의 일방적인 그의 말을 들으며 묵묵히 밥만 먹고 헤어졌다. 심기를 건드리면 그 자리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기에,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30년 동안 한결같았다. 30년 동안 꺾이지도 부드러워지지도 않았다. 그가 30년 동안 바뀌지 않는 동안,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동안,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이 바뀌었다. 자신이 맞다고 하는 말에 당신이 틀렸다고 대답했다. 하라고 하는 말에 안 하겠다고 했다. 오랜 세월,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꼭대기에서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그건, 당신의 잘못이라고 대적했다.

이혼을 결심하던 즈음, 전 배우자의 부친과도 갈등을 겪었다. 본인의 아내 포함, 누구도 자신을 대척하지 않았는데. 나 또한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말에 그저 순응했는데, 조곤조곤 자신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다툼의 끝에 그가 버럭 소리 질렀다.


넌 변했어.

그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변했다. 아주 많이. 순응하던 사람에서 역행하는 사람으로 완벽하게 변했다. 나를 위해서 나는 변해야 했다. 긴 세월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 마음에 묻고 살았을까. 그것들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그런 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나는 변하고 나서야 숨을 쉬었다. 이전의 나를 버리고서야 다시 살 힘이 생겼다.


그의 지난날을 알고 있다. 그의 고난과 역경과 드디어 찾은 안정과 권력과 재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십 대에 어떤 힘듦을 겪었는지,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것 같다. 의지할 데 없는 십 대를 거쳐 이룬 가족을 어떤 마음으로 지키고 싶었을지도 알 것 같다.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에 집착했던 것도, 왜 그렇게 돈을 축적하는 일에 전력했는지 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방식이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강압적인 행동과 강요와 모진 말들이 여전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

통곡의 이유는 복합적이다.


애증은 아니다. 나는 그에게 ‘애’는 없고 ‘증’만 있다. 그런 채로 소원했고 그런 채로 가버렸다. 끝내 불화한 관계로 남았다. 그가 한 일들은 분명 사과받을 일들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로 난도질당하는 동안, 나는 어땠더라. 짓이겨지고 나 자신이 더없이 하찮게 느껴졌지. 대응할 힘이 없어 참는 수밖에 없던 그때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선명해서 그를 용서할 생각이 여전히 없다.


뒤섞인 감정 중 어떤 것은 알 것 같다. 영정 속의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인생이 허무해졌다. 허무라는 감정이야 처음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사무치게 허무했다. 내가 그를 아는 기간 내내, 그는 돈에 집착했다. 돈을 모으는 일에 전력 질주했다.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는 그저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죽을 때 동전 하나 가져가지 못했다. 다 두고 혼자 떠났다. 빈손으로 고독하게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인간이구나. 나도 내가 믿는 것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다가 끝끝내 사라지겠구나. 애틋했던 것 중, 단 하나도 못 가져가겠구나.

또 한 가지의 이유는 좀 어이없다. 미운 중에 그래도 고마운 것은 있었다는 것이다. 밉고 용서할 수 없는 마음과 별개로 고마운 것들이 떠올랐다. 덕분에 누렸던 안락한 삶. 경제적인 여유, 내가 아니라 내 역할에 대한 것이지만 더러는 잘하고 있다고 인정해주기도 했던 순간.


미워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니 그의 죽음이 애통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건, 징글맞게 긴 시간의 힘이다. 그 긴 시간이 밉긴 미운데, 고마운 것도 있긴 있었지, 하고 떠오르게 하는 것.


거기서 왜 통곡을 했느냐는 딸에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너는 몰라. 나는 네 할아버지를 30년 동안 봤어.


혈연이 아닌 누군가와 30년 이상의 시간을 함께 한다면 설혹 서로를 증오하며 이별한다 해도 홀가분하게 감정이 털어지지 않는다. 어이없게 슬픔이 찌꺼기처럼 남는다. 예전의 상황을 곱씹으며 그를 증오하는 순간도 줄어들고, 미운 마음도 차츰 잦아든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한 사람이 영원히 사라졌다.


가까운 친척들이 다 함께 고인의 유골을 안치한 추모원에 가기로 했다는 말을 아들이 전했다.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했다. 아들의 양복을 꺼내 걸어놓고, 인사 잘하고 오라고 했다. 할아버지에게 이제 그곳에서는 편안하시라고 말하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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