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
몇 년 전,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써서 올릴 수 있는 앱이 있었다. 현재는 서비스가 종료된 상태이며 내 휴대폰에서도 삭제된 지 오래다. 새 글을 게시하면 누군가 공감이나 댓글을 달았다. 다양한 주제에 맞게 글을 쓰는 코너도 있었고, 일주일마다 회원들이 올린 글 중에서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기도 했다.
글이나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온라인상의 공간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곳은 좀 더 폐쇄적인 느낌이었다. 글쓰기 서비스를 제공하는 앱이 있다고 알려줘도 생소해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꼈다. 내가 쓴 글에 대한 평가에 위축되지 않고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소통하는 소규모 모임 같은 분위기였다.
게시되는 글들은 주로 일상의 소재를 다룬 에세이였고, 공감하는 글에는 댓글을 남겼는데 그게 꽤 위로가 되었다.
간결하게 쓰는 사람, 글의 주제가 언제나 따듯한 사람, 시를 써서 올리는 사람, 담백한 문장으로 감동을 사람까지 글 친구가 점점 늘어갔다.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이 좋았다. 그런데 글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는 그들을 모르는데, 그들의 글을 읽으며 차츰 그 사람의 생각과 그 사람의 가치관과 그 사람의 상처,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통과했는지까지 알게 된다.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나 또한 오래된 친구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 약점이나 상처를 그곳에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모르는 사람의 다정한 말이 위로가 되었다. 가상의 그 공간이 마치 대나무숲 같았다. 비밀 일기장을 펼쳐 보여주듯 온갖 것들을 털어놓고 나면 속이 다 후련했다.
특히 더 가까워지는 사람도 생겼다. 공통점이 많아 공감대가 비슷한 경우에 그랬다. 기혼이며 자녀가 있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래서 서로의 글에 자신도 그렇다며 공감해 주는 여자들. 내가 쓴 글보다 훨씬 더 긴 분량의 다정한 댓글을 남겨주던 여자들.
그런 여자들 중, 누군가 만남을 제안했다. 나는 그때 왜 격렬하게 반기며 그 제안에 찬성했을까. 아무리 글을 통해 친숙해졌다 하더라도 얼굴도 모르는 그녀들을 아무 의심 없이 만날 마음을 먹었을까. 평소의 나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고 용기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매우 비관적인 편. 관계의 무한함에 회의적인 편. 새롭게 관계를 맺는 것과 오래된 관계를 끊는 경우 모두 힘겨워하는 편. 굳이 관계를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전혀 없는 편. 심지어 이미 맺은 관계들을 지켜나가기 버거워 혼자 끊어낸 이들도 있다(많다). 40년 된 친구와도 이별했고, 아이들 유치원이나 학교 엄마들과도 이별했다. 여전히 한 동네에 살면서 아는 척하지 않았다.
연락을 하지 않고 연락을 받지 않는 소극적인 방법만으로 끊어진 관계는 오히려 더 홀가분했다. 이별조차 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가는 관계는 남은 힘마저 전부 다 소진시킨다. 결혼생활의 균열이 차츰 더 커지던 무렵이었다.
그럴 때, 나는 모르는 그녀들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시흥에 사는 메리골드님과 화곡동에 사는 서쪽하늘님, 그리고 화양동에 사는 바그다드 카페(나의 닉네임이다. 바그다드 카페는 나의 인생 영화이기도 하다)는 동작역에서 만났다. 온라인에서 먼저 아는 사이가 되지 않았더라면 시흥에 사는 여자와 화곡동에 사는 여자. 그리고 화양동에 사는 여자 셋이 어떤 인연으로 만날 수 있었을까. 평생 모르는 채로 모르는 삶을 살아갔겠지. 화양동에 사는 여자는 50년 넘게 살았어도 시흥이나 화곡동에 간 일이 없다. 시흥의 그녀도 화곡동의 그녀 또한 그랬다.
약속 장소에 모이기 전, 우리는 단톡방에서 먼저 연락을 나누었고, 시간에 맞춰 전철역에 다들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세 여자는 개찰구 근처에서 얼굴을 모르는 친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비슷하게 나이 든 여자들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혹시 메리골드님? 혹시 서쪽하늘님?
바그다드 카페 님이신가요.
서로의 숱한 글을 읽었고, 그 글을 통해 대략적인 가정사를 알고, 취미나 취향, 사는 곳을 알고 있으니, 실제로 만나기 이전에 마음이 먼저 친해졌던 사이. 우린 그렇게 처음 서로의 얼굴을 대면했다.
천변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 미리 준비해 간 소소한 선물을 주고받고 간식을 사서 나눠 먹으며 반나절을 함께 있었다. 만난 지 이제 몇 시간. 어색하긴 했지만, 서로의 글에 대해서 함께 아는 다른 이들의 글에 대해서 그리고 글 밖에서의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그 만남이 꽤 즐거웠기에 세 번의 오프라인 만남이 더 있었다. 아마 코로나가 닥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렇게 오래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드문드문 만나며 친교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점차 멀어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한 번에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주까지 수업이 진행되던 문화센터의 강좌가 갑자기 폐강되고 오프라인 모임이 해체되고, 사회적 관계들이 끊어졌다. 열성적으로 글을 쓰고 올리던 회원들도 하나둘 떠났고, 오프라인에서 만나 즐거웠던 메리골드님, 서쪽하늘님도 멀어졌다. 우리의 관계는 짧고 얕았으니 어쩌면 가장 먼저 해체된 모임이었을 것이다.
내게 힘든 일이 막 터졌을 당시, 역시 힘든 일을 겪고 있던 서쪽하늘님의 연락을 받았다. 나도 그녀도 말을 걸어줄 누군가가 절실했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서쪽하늘님이 말했다.
그때 연락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이들처럼 우리는 멀어졌겠지, 서서히 모르는 사람이 되었겠지.
하긴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호하고 느슨한 관계들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나니 감정 소모도 덜하고 오히려 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 역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닫힌 방 안에서 혼자인 것이 편했다.
그런 내가 서쪽하늘님과 호캉스까지 했다. 말을 편하게 놓지도 못하고, 아직 이름보다 닉네임으로 부르는 것이 편했던 때, 그녀가 호텔에서 하룻밤을 같이 묵자고 했다. 그녀의 딸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엄마에게 가족을 떠나 호텔에서 쉬고 오라며 숙소를 예약해 주었다고 했다. 혼자 쉬려고 준비하다 내가 생각나서 연락을 했다고 했다. 지금 올 수 있느냐고 그녀가 물었다. 전화를 끊고 잠깐 고민했다. 잠깐 고민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서 가겠다고 했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아직은 덜 친한 그녀와 잠을 자러 갔다.
한강에서 일몰을 보고 폭신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밤새 이야기했다. 우리는 둘 다 글쓰기와 독서를 좋아했으니 할 말이 많았고, 놀랍도록 비슷한 문제로 갈등 중인 배우자가 있어 흉볼 사연도 많았으니 이야깃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에게 맞서 대응하지 못했던 억울하고 부당하고 무시당했던 일들. 중년 부부의 위기는 밥상에서 방점을 찍나. 밥상에 얽힌 에피소드는 아무리 주거니 받거니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지금도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미 종지부를 찍은 결혼생활 중, 밥상에 얽힌 에피소드가 새롭게 등장한다). 그러니 이혼이 두려우신 중년의 남편분들은, 부디 주는 대로 감사히 드소서. 드시고 나면 부디 설거지 정도는 나서서 하소서.
꿈 이야기도 했다. 성취하고 싶은 목표 말고 밤에 잘 때 꾸는 꿈.
“지금까지 살면서 꾼 가장 무서운 꿈은?”
서쪽하늘 님의 질문은 뜻밖이었고 새로웠다. 내게 무서운 꿈이 무엇이었냐고 묻는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호텔 방 안에서 나는 기억에 또렷한 꿈 이야기를 했다. 아무도 묻지 않아 말할 일이 없던 꿈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들려주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편과 일 년 동안 국내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지낸 서쪽하늘님에게서 짧은 엽서를 몇 번 받았고, 그녀가 남편상을 당했을 때 조문을 갔다. 나는 이혼소송을 시작했고 30년 가까이 살던 집을 나와 새 집으로 이사했다. 각자의 큰 산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의 인연도 이어졌다.
이제는 서로 서쪽하늘이나 바그다드카페라는 닉네임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부른다.
그녀의 이름은 선희.
글이라는 인연으로 만났으니, 기분 좋을 때는 서로 작가님이라며 추켜세워준다.
때로는 작은 일에도 즐거워하며 웃고 떠드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 같다.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고 새로운 경험을 함께 한다. 혼자 도전하기에는 망설여지던 일들도 같이 하면 용기가 생긴다. 덜 부끄럽다. 아주 늙지는 않았지만 이제 더는 젊지 않은 50대 후반의 중년. 노안이 오고 관절이 저리기 시작하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배우며 그 과정이 서툴고 느리고 실수투성이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거나 오해해도 코미디를 보듯 그저 웃겨서 우리가 덤 앤 더머 같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문자나 전화 연락을 주고받은 친구를 묻는다면? 답은 선희.
가장 최근에 만난 친구를 묻는다면? 그 답도 선희.
가장 많이 여행을 함께한 친구가 누구냐고 물어도, 역시 선희.
나의 실패와 나의 비겁함과 나의 좌절과 나의 악의와 나의 편견을 잘 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진심으로 믿고 좋아하는 것이 전해지는 친구.
그러니까 지금의 내 베스트프랜드는 선희.
우리가 좀 더 빨리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녀가 문득 그런 말을 했던 어느 밤이 있다.
그러면 아마 지금은 친구가 아닐 듯?
이것은 나의 대답.
이런저런 일들에 치이고 넘어지고 아물며 세월을 보낸 후의 만남은 더 깊다. 지난날, 영원을 약속한 이들은 지금 내 곁에 없다. 서로의 다른 친구를 질투했던,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하기를 원했던, ‘우리의 우정 영원히’라고 새긴 목걸이를 나눠 가졌던 친구와도 오래전 헤어졌다.
더 가까웠고 더 친밀했고 더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더 큰 것을 바랐다. 그때 그녀가 친구였더라면 아마 나는 더 큰 것을 바라고 더 큰 마음을 바라고 더 크게 실망하고 차갑게 돌아섰을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며 차츰 타인에게 크게 바라는 것이 없다. 실망하는 일이 없고, 오해하는 일도 없다.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안 되는지 조심하게 되고, 나와 다른 부분도 수용하게 된다. 상대가 다치지 않는 거리를 존중한다. 나와 같거나 다른 있는 그대로의 그와 스며들듯 가까워지며 안도한다.
요즘 우리가 쿵작이 맞는 건, 오일파스텔로 그림 그리기. 같이 여행을 떠날 때면 스케치북과 오일파스텔을 챙겨간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들과 사진을 엮은 여행기 공동 출간하기. 친구의 똑순이 딸이 도와주겠다고 해서 더욱 든든하다.
선희야, 너랑 노는 거 참 재미있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선물이다. 80살 호호 할머니가 된 그녀와 여전히 재미있게 놀고 싶다. 90살이 되어서도 우리가 덤 앤 더머였으면 좋겠다. 그때도 뭔가 새로운 작당 모의를 하며 눈을 반짝이는 할머니들이면 좋겠다. 공원을 느리게 산책하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그날들이 얼마나 따스울까.
그림과 영화와 책과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내가 쓴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는 친구를 지금 만난 것은 어쩌면 행운이다. 바쁜 날들이 어느덧 지나고, 뾰족했던 마음이 유순해지면서 조금씩 나를 위해 펼쳐진 시간이 넓어지는 지금이야말로, 우정을 나누기에 가장 좋을 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