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영업 종료된 백화점의 아웃도어 매장에서 일할 때 희수를 만났다. 희수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었다. 대체로 운이 나쁜 편인 내가 희수를 만난 건, 그나마 행운이다. 폭력적이고 지저분한데 매력적인 여자가 어디 또 있을까. 오직 희수뿐이다.
경기는 계속 좋지 않았으며(하긴 언제는 좋았었나. 경기가 좋지 않다는 말은 내가 경제활동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들어왔다) 백화점 매출 역시 하향곡선이었다. 적자가 계속되는 와중에 최저시급까지 오르자 판매 직원을 한 명 줄이겠다는 본사의 지침이 전해졌다. 매니저는 오래 함께 일해 온 나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한 막내 중에 누구를 잘라야 할지 고심했을 것이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내가 매출에 끼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것은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심성이 착해 차마 내게 퇴사를 권유하지 못하는 것도 눈치껏 알 수 있다. 일 못하고 사교적이지 못하고 나이 많은 나를 점점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결국 내 입에서 그만두겠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래, 잘 생각했어. 전망도 없는 판매 일을 계속하는 거보다 하루라도 빨리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이 형한테도 좋을 거야. 진작 다른 일을 시작했어야 하는데 늦긴 늦었지. 이제라도 잘 결정했어. 형도 잘 알잖아. 백화점은 이제 끝났어. 나도 늦기 전에 어서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는데 큰일이야.
매니저는 고민이 단번에 해결되어서 시원하다는 듯 그제야 며칠째 굳어있던 얼굴을 폈다. 인원을 줄이고도 매출이 계속 저조하다면 결국 매장을 철수할 거였다. 임대 매장 몇 개가 빠지고 다시 새로운 매장이 들어오는 일은 백화점에서는 흔한 일이다. 전년 대비 매출 신장이 되지 않고, 매출이 오르지 않을 경우, 매니저 역시 일자리를 잃게 되겠지. 그렇지만 당분간은 그럭저럭 유지될 테고 오토바이를 사기 위해 1년짜리 적금을 들기 시작했다는 막내는 만기까지 그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암튼, 그만두기 전에 막내하고 셋이 밥이나 먹자고.
백화점 같은 층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폐점 후 종종 어울려 회식을 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야구나 축구 얘기에 열을 올리다가 야한 농담에 낄낄거리고 지나가다 괜히 불러 세워 놓고 우리 백화점의 서비스 5대 원칙을 묻는 재수 없는 임직원 새끼들이나 다섯 켤레를 즉흥적으로 사가고는 다음날, 하필이면 개시도 못하고 있을 때 와서 죄다 반품해 버리는 진상 고객을 안주 삼아 질겅질겅 씹는 회식 자리에 나는 끼지 않았다. 두어 번 권하다가 나중에는 따돌렸는데 오히려 편했다. 휴게시간이면 창고에 틀어박혀 휴대폰 게임이나 하고 있고 여자한테 맞으며 산다는 혐의가 다분한 나 역시 험담의 대상일 테지만 무슨 대수냐 싶었다.
술은 언제나 희수와 마셨다. 나는 희수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희수가 주로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듣는 편이다. 과대포장을 한다는 의심이 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여자 허언증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워낙에 말을 잘하니 홀린 듯 빠져든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녀의 매운 손맛을 봐야 하니 아무리 취해도 집중해서 듣고 과장된 추임새도 넣는다. 희수의 엄마까지 셋이서 마실 때도 많았다. 그런 날이면 희수의 엄마는 냉장고를 뒤져 부추나 미나리, 신 김치로 부침개를 만들었다. 내게는 희수와 희수의 엄마로 충분했다. 두 사람만 있으면 됐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희수의 엄마는,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자꾸만 했다. 같은 말을 또 듣는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엄마가 늙어서 창피하다며 학교에 절대로 못 오게 했다는 이야기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몇 십 번이나 했다. 아닌가, 몇 번에 불과한가. 현실에서의 대화는 자주 꿈이나 몽상처럼 비현실적인 곳에서도 재생되곤 했으니 나는 그 이야기를 정확히 몇 번 들었던 건지, 모르겠다.
하루는 학교에 갔는데 이희수, 밖에 너네 할머니 왔어, 친구가 그러더래. 그 말을 듣고 집에 와서는 지랄발광을 떨었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 꼴을 봤더라면 너도 쟤한테 정나미가 떨어졌을 거다. 나도 그랬거든.
그때 광경이 떠오르는 듯 희수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수 흉을 스스럼없이 늘어놓는데 딸을 흘겨보는 눈은 사납지 않았다.
내가 저걸 마흔일곱에 낳았어. 그러니 얼마나 짠했겠어? 나 환갑에 쟨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거든. 그래서 뜻을 다 받아주고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며 키웠더니 저게 그때부터 성질이 드세다. 딸년은 매정해서 무슨 말만 하면 했던 얘기를 왜 또 시작하느냐고 버럭 하는데 너는 내 이야기를 잘도 들어주는구나. 그냥 네가 내 아들 해라.
술 취한 희수의 엄마는 나를 얼싸안기도 했다. 내가 불쌍하다며 얼굴을 손으로 쓸기도 했는데, 굳은살 박인 거친 손길이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