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5

by 함지연

희수와 나는 헤어진 연인 사이이다.


헤어진 채로 아직 한집에 산다. 정확히는 희수의 집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희수의 집에서 나만 떠나면 된다.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하는 나와 아침 9시 20분에 집으로 돌아오는 희수는 만날 수가 없다. 작별 인사를 할 수가 없다. 작별 인사도 없이 그녀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런 채로 시간이 가고 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출근을 하기 위해 신발을 신던 현관 앞에서 희수와 딱 마주쳤다. 그녀가 퇴근해서 돌아오려면 아직 50분이나 남은 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치자 너무 놀라 딸꾹질이 났다. 희수는 아예 작정하고 그 시간에 들어온 것 같다. 헤어지기로 합의를 마친 이후에도 줄곧 난 그녀를 피했다.

이대로 시간을 끄는 건 희수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 사랑을 하고 싶으면 사랑을 하고 때리고 싶으면 가차 없이 때렸다. 다가온 것도 입맞춤도 그녀가 먼저였다. 우리는 만난 날 바로 모텔에 갔다. 나 같은 처지의 사람이 마음에 든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있나. 기꺼운 마음으로 나의 동정을 넙죽 바칠 수밖에. 그녀가 아니었다면 난 평생 숫총각으로 살다 죽은 후, 몽달귀신이 되었을 거다.

다음 주 월요일이 백화점 정기 휴무일이지?

어.

너 언제 이사 나갈지 그날 확실히 정하자. 이렇게 계속 지낼 수는 없잖아. 빨리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

희수야,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야. 당연히 나가긴 나갈 건데 조금만 기다려줘. 내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 있는데 그걸 어디 뒀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그게 뭔데? 너 일단 방부터 구해 나가면 내가 찾아서 돌려줄게.

미안한데, 희수야. 내가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지각이거든. 저번에도 지각을 해서 매니저한테 찍혔어. 나중에 쉬는 날 다시 얘기하자.


그렇지만 백화점이 쉬는 월요일 아침, 도망치듯 집을 나온 나는 오후 8시 30분까지 길 위에서 서성였다.

어디야?

중요하다는 그 물건은 찾았어?

언제 들어올 거야?

언제 오냐고!

네 짐들 집 밖에 싹 다 내버릴 거야.

야, 이 시발새끼야, 당장 기어 들어와.

문자 알림음이 계속 울렸다. 희수의 문자에 모두 답장하지 않았다. 한강으로 나가 컵라면을 사 먹고 핸드폰 게임을 하고 맥주 한 캔을 마시고 공중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서늘한 한강 다리 아래에서 낮잠을 잔 후 또 컵라면을 사 먹고 희수가 출근한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기어 들어갔다.

좁고 너저분하고 어둡고 안락한 내 이불속에 빨리 눕고 싶었다. 혹시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버리거나 하지 않았을까 쫄았는데, 다행히 문이 열렸다. 내 짐도 버린다고 협박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생각해 봤는데.

어.

어차피 방이 하나 비잖아.

어.

사실 고시원보다도 비좁긴 하지.

그래서?

방을 구하려면 여기저기 다녀봐야 하는데 백화점이 늦게 끝나니까 시간이 없어. 넌 이사를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 방이나 덜컥 계약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수압은 괜찮은지, 방음은 잘 되는지, 보일러 교체한 지는 얼마나 됐는지. 그 방에서 전 세입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지, 바선생이나 유령 개미가 없는지도 신경 써서 확인해야 해. 장마 때 하수구가 역류하지는 않는지, 겨울에 결로현상이 있는지도 봐야 해. 곰팡이로 뒤덮인 방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니, 희수야? 그런 방에서 살면 없던 병도 생기거든. 내가 곰팡이 알레르기가 있는데 내가 말했던가? 되게 심각한 편이라 목구멍이 부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 그리고 집주인이 융자를 얼마나 받았는지 혹시 갭 투자가는 아닌지 이것도 되게 중요하다? 잘못하면 보증금을 떼일 수도 있거든. 방을 구하려니 따져봐야 할 게 엄청 많아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열세 번이나 이사를 다녀 봐서 잘 알지.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희수야.

계속해봐.

그냥 내가 너한테 월세를 내며 저 방에 계속 사는 건 어떨까? 50에 무보증으로.

미친 새끼,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는데 손등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딱 봐도 때릴 기세여서 나는 잽싸게 방으로 도망쳤다.

그럼, 60은 어때? 그 이상은 곤란한데.

안전하게 잠긴 방문 안에서 내가 소리쳤다. 희수가 내리친 주먹에 이미 금이 간 문짝에 새로운 금이 길게 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