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방문 너머에서 희수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로션을 바르다 동그란 뚜껑을 놓쳐 또르르 구르는 소리가 난다.
희수는 키득거리며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한참이나 한다.
희수는 저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지, 나는 웃는 그녀가 그립다. 더 이상 희수는 나를 보며 웃지 않는다.
그래, 너도.
희수는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인사한 후, 전화를 끊는다.
유튜브를 열어 ‘그것이 알고 싶다.’ 동영상을 재생시킨다. 반복적으로 들어 내 꿈에도 나올 것 같은 내용들. 희수가 열광하는, 희수가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는.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들, 백골 시신으로 발견된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미친 사람들, 부서지거나 조각 난 사람들.
산책을 나온 어린이집 유아들 몇 명이 집 앞을 지나간다. 날씨가 좋은 평일 오전 11시면 규칙적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 애들 앞뒤로 뒤로 아기 둘을 유모차에 태운 보육교사가 걷는다. 작은 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환기되는 것 같아 창문을 한 뼘쯤 열고, 골목을 꺾어 사라질 때까지 구경한다. 보육교사 몰래 손을 흔들면 눈이 마주친 아이 한 명이 인사를 해주기도 한다. 보육교사가 경계할까 봐 말은 시키지 않는다. 아이들이 멀어진 후, 창문을 닫고 외부의 소리가 사라지고 나면 희수의 방에서 낮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른한 낮의 시간들이 지나고 저녁이 되어 출근을 하기 전까지 그녀는 곤히 잠들 것이다.
잘 자, 희수야.
벽 너머의 희수에게 인사한다.
희수도 요즘 악몽을 꾸나. 나는 그런 것이 궁금하다.
근래의 희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하긴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관계이긴 하지. 아는 사람의 식당에 야간 일을 다닌다고 했지만,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희수가 내가 일하는(지금은 그만둔) 백화점 매장에 와 본 일이 없듯이 나 역시 그녀가 일하는 식당에 가지 않았다. 그녀가 안다는 사람이 아는 여자인지 아는 남자인지 모른다. 그녀의 발가락을 핥고 깨물어 주는 누군가 곁에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희수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을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하다.
물론 나는 염치가 있는 인간이다. 누구에게든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치는 것을 원치 않고 그렇게 살아왔다. 헤어진 연인 희수의 집에 이대로 얹혀사는 것이 지질하고 염치없는 행동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아버지에게조차 난처하고 부담스러운 부탁을 해본 일이 없다. 스무 살 때 집을 나와 자취를 시작하며 받은 보증금 삼백만 원과 대학 등록금 사백만 원이 끝이다. 그중 자퇴하며 환불받은 이백여만 원은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빚을 졌던 아버지에게 도로 주었다.
반면 아버지는 염치가 없다. 빈번히 내게 돈을 요구했다. 덕분에 나도 아버지도 돈이 없다. 나의 염치 있음은 모계로부터 유전된 것일까. 죽은 어머니의 친척들과는 절연했으니 알 수가 없다.
지인에게 다단계 사기를 당한 어머니가 자살했을 때도 아버지가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어 뿔뿔이 흩어져야 했을 때도 재수해서 들어간 대학을 이십일 만에 자퇴했을 때도 나는 꿋꿋했다. 자립심이 강하거나 의연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은 넘어져도 크게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크게 좋을 일이 없을 일생이어서 나쁜 일이 생기면 난 또 새로운 모양의 불운이 내게 왔다고 순응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가령 어느 날 예고 없이 문을 닫고 사라져 버린 마트 사장 때문에 밀린 월급도 날리고 실직하게 되었을 때, 공사장을 따라 전국을 떠돌며 모텔 방에 장기 투숙하는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달라고 하겠나, 아니면 보잘것없는 친정이라고 무시하는 남편과 시가 때문에 속을 끓이며 사는 누나에게 손을 내밀겠나.
하나의 불운이 내게로 온다. 그 불운에 무뎌지고 적응할 무렵, 돌부리이거나 닫힌 문 같은 불운이 다시 내게로 온다. 그게 지금까지의 내 삶이다. 그런데 희수의 집을 떠나 문밖에 선 내 모습을 상상하면 절망스럽다. 모르는 길 위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다. 세상 끝에 다다른 기분이다. 희수의 집 문을 열면 밖은 그저 단단한 벽일 것 같다. 그래서 두렵다. 이길 수 없는 불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