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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음을 그려 너의 마음을 써

by 함지연

오래 사귄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이사를 하고 처음 방문하는 거라,

집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협소해져서 공간도 부족하고 어수선하다.

아무리 내 명의의 첫 집이라고 해도

30년도 더 된 구옥 주택은 여기저기 낡고 수리해야 할 부분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감추고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것들이 그대로 보인다.


친구는 무례하지 않았다.

구석구석 관찰하듯 자세히 보았다면 나는 좀 부끄럽고 난처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리가 덜 된 자녀의 방과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층층이 쌓인 베란다는

열어보지 않았다.

대신 내 그림을 여러 개 걸어 놓은 현관 옆 벽 앞에 오래 머물렀다. 그 그림들을 하나씩 찬찬히 오래 보았다.


점심 식사는 밖에서 먹고 와서 차와 과일을 준비해 내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 방에도 미완성 그림 몇 점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림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줘, 나도 배우면 너처럼 그릴 수 있어?”


일을 그만두고 나면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친구는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다. 월차를 내고 내 집에 놀러 왔던 날이었다. 당장 일을 그만둘 계획이 없으니 몇 년간 더 바쁠 것이다. 주 5일 근무를 하며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일은 주 5일이지만, 집안일은 주 7일 이어진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기 위한 시간을 내는 건, 친구에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나는 그녀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거나 글을 쓰라거나 선뜻 권유하지 못한다.


배우면 너처럼 그릴 수 있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배운다고 ‘잘’ 그릴 수는 없다고. 그림을 그려보지 않았던 친구의 눈에는 어설픈 내 그림이 ‘잘’ 그린 그림으로 보일 수 있으나 나 역시 나보다 ‘잘’ 그린 그림 앞에 서면 어떻게 하면 저 화가처럼 잘 그릴 수 있을까 부럽고 작아진다.

그건 글쓰기에서도 동일하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작가님들처럼 ‘잘’


그들처럼 ‘잘’ 쓸 수 없으니 나는 그럼 글쓰기를 멈추어야 할까. 이미 이 세상에는 근사하고 멋진 글이 많으니 나는 글쓰기를 하지 말아야 할까.

다른 사람의 그림과 글을 연모하면서. 추앙하면서 한편으로 좌절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고,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억누르면서.

근사한 그림을 그리고 근사한 글을 쓰려면 그릇이 커야지. 커다란 재능이 있어야지.

내가 만들어낸 엄격한 목소리는 가혹하리만큼 냉담했다.

그릇이 작은 네가 이만큼 온 것은 그나마 운이 있었기 때문이야. 마침 그때 운이 좋았던 거지.

현실의 나는 그 목소리에 수긍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고 글을 ‘잘’ 쓰지 못하는 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만 남은 사람으로 살았다. 체념하며 사는 삶이, 나만의 목소리가 없는 삶이 행복하지는 않았다.


이제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린다. 글을 쓴다. 나를 억눌렀던 ‘잘’이라는 부사를 떼어버리고 나니 오히려 가뿐하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잘하고 싶었을 때는 자신감이 없어 흐렸던 색칠을 이제는 선명하게 색을 칠한다. 내가 그린 그림을, 내가 쓴 글을 주저 없이 보여준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온라인 공간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내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들의 장점만을 엮어 새로운 나를 만든다면 그게 온전한 나일까. 내가 만든 프랑켄슈타인일까.


내가 가장 잘 아는 내 마음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때 비로소 고유의 내가 존재한다. 솔직한 내 마음을 드러냈을 때 나만의 그림이 글이 완성된다.

"이 그림 어때? 잘 그렸지?"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서 ‘잘’은 고흐나 클림트처럼 그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마음을 자유롭게 그렸다는 것이다. 브런치나 블로그, 스레드에 올리는 글 역시 그렇다. 나는 한강이나 도리스 레싱처럼 ‘잘’ 쓰지 못한다. 아니 에르노처럼 다른 나라의 독자를 가진 유명한 작가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쓴 글을 잘 썼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솔직하게 썼으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훔쳐오거나 흉내 낸 것이 아닌 진짜 나의 마음을 글로 썼으니까.

내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자유로워지니 다른 사람의 마음도 그 마음이 드러난 글과 그림도 존경하게 되었다.


얼마 전, 꽤 유명했고 꽤 잘 팔리던 책의 저자가 거짓으로 자신의 경력을 위조했던 사실이 드러났고, 변명이나 사과 없이 생을 마감했다. 워낙 유명했던 책이라 내게도 익숙했는데, 빠른 시간 내에 거짓이 들통나고, 서점에서 사라지고, 글쓴이 역시 영원히 사라졌다. 그 시끌벅적한 사건의 시작과 끝에 대한 정보를 나는 고작 일주일 만에 알게 되었다. 들어본 적이 없으니 어떤 마음이었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어쩌면 ‘잘’하고 싶었나 보다. 유명해지고 싶었나 보다 짐작만 할 뿐.


‘잘’이라는 부사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쓰는 이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나도 이제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 그러려면 앞으로도 내 마음은 내 목소리로 꺼내야 하겠다.

“친구야, 너도 네 마음을 그려. 네 마음을 써.”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거나 쓰게 될 친구. 해바라기 같은 그녀는 어쩐지 해바라기처럼 노란색 그림을 그리게 될 것 같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마음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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