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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

체념의 반대말은 저항이다

by 함지연

배우자와의 갈등과 별개로 나는 시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시어머니의 삶에 대해서. 그녀가 내게 반복해서 털어놓은 한탄을 통해 이제까지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고 고단했을까 공감했다. 그것은 순전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녀가 혼자 감당하던 일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분담했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내가 하겠다며 나섰다. 같이 하면 금방 할 수 있고 수월하게 끝낼 수 있으니까. 우리는 가족으로 엮인 사이였으며 늙은 시어머니 대신 젊은 며느리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딸이 없는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하기에는 과한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고, 어쩌면 나보다 그녀가 더 힘들겠다는 오해를 했던 것 같다. 그녀의 힘듦이 내 힘듦보다 훨씬 크다고 착각을 했던 것 같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런저런 필요한 것들을 사다 날랐고, 닥쳐서 바쁘지 않게 미리 밑반찬을 만들었다. 시가 식구들이 잘 먹는 황태는 부드럽게 불려 고추장 양념을 바른 후, 켜켜이 반찬통에 담고 오이소박이도 한 통 담아 먹기 좋게 익혔다. 가게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두부집에 줄을 서서 두부를 사 와서 간수를 뺀 후, 부서지지 않게 가져갔다.

고사리는 얼마나 사야 하는지 송편이나 가래떡은 얼마나 필요한지 등등 나서서 의견을 냈다. 시어머니도 나를 가장 의지한다고 자주 말했고, 손아랫동서는 형님이 일도 잘하고 솜씨도 있어서 든든하다고 했다. 큰엄마가 만든 부침개가 맛있더라는 시조카의 말을 전해 들으면 당장 또 만들어서 퍼다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는 그게 내 왕관인 줄만 알았다.


여자니까, 며느리니까, 여자는 '시집'을 가면 당연히 '시집' 식구가 되는 거니까.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노력한다면 인정을 해 주겠지. 최대한 빠르게 인정받기 위해 뭔가 더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좋은 결과를 내야겠구나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잘'하고 싶었다. 내가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하고 싶은지, 갈망하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남이 보기에 '잘'하고 싶었다


나는 만두를 잘 빚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이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녀들은 너무 마르지도 너무 뚱뚱하지도 않게 적정 체중을 유지하도록 양육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과소비를 하지 않고 더 싸게 파는 마트를 찾아디니며 아끼려고 노력을 했다. 결혼 후 나를 둘러싼 사회는 협소했고 오랜 시간 동안 확장되지 않고 구성원들의 변화도 없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여자들은 다 그렇게 사니까, 그녀들도 당연하다고 여기며 나와 같은 노력들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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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을 맞은 시어머니를 위해 여자들끼리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밥이 중요한 집안이라서 밥을 하는 여자들이 긴 시간 외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팔순이라는 이벤트 덕분에 수월하게 여행이 진행될 수 있었다. 2박 3일간의 제주도 여행. 결혼하고 20년 만의 여행이었고, 또 마지막이기도 하다.

패키지여행 특성상 정해진 일정을 따라다니느라 바빴지만, 단체 일정이 끝난 후, 저녁 시간은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사진만 후다닥 찍고 이동했던 관광지에서의 시간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은 이사를 오며 전부 버렸으니, 어디 어디를 관광했는지 되짚어 봐도 잘 모르겠다.


오히려 해가 떨어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식당에서 차례대로 나오는 신선한 재료들로 만든 만찬을 맛보던 시간, 꽤 먼 거리였지만 숙소까지 걸었던 산책로, 숙소를 함께 쓴 손아랫동서와 맥주를 한 캔씩 마시고 푹신한 침대에서 뒹굴며 우리가 5성급 호텔에서 잠을 자는 순간이 오다니, 이런 수다를 떨던 새벽, 그런 순간들은 오래 남는다.


이제는 미운 사람들이 되었는데도 제주에서의 3일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건 왜일까. 푸른 바다가 좋았나. 떠난 것이 좋았나. 우스운 이야기를 하며 계속 웃어서 그런가. 아니면 3일 동안 밥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한 기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우리 대화의 주된 주제는 ‘저녁 밥상에 무슨 국과 무슨 반찬을 올리느냐’ 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국과 반찬 메뉴를 고민하며 20년 밥상을 차린 여자와 50년을 차린 여자는 새로운 국과 반찬으로 밥상을 차리는 반복에 대해 부담과 지겨움을 공감했더랬다. 50년이 넘도록 저녁 밥상에 매어 있던 시어머니에게 오후 6시에 바다 바람을 맞으며 걷던 느긋한 산책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시어머니의 생신 때마다 이렇게 여자 넷이 여행을 다니자고 했던 건, 누구였더라. 기분이 좋은 김에 즉흥적으로 누가 의견을 냈고, 찬성하고 누가 다음 여행을 계획했더라. 가족이지만 성은 다른 네 명의 여자는 다음 여행을 당장 떠나기라도 하듯 흥분했었다. 밥을 안 하니 이렇게 행복하구나, 했고, 다들 그렇다고 손뼉을 치며 키득거렸다.


그랬던 우리는 몇 년 후에 남이 된다. 아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만약 지금 이 순간, 길에서 우연히 그들과 맞닥뜨린다면 나는 냉랭한 표정을 짓고 외면할 것이다. 또는 그들이 먼저 나를 차갑게 외면할 것이다.


남의 편과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이젠 돌이킬 방법이 어렵던 채로, 나는 며느리 역할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제사 음식을 준비했고, 시부모의 생일을 챙겼고, 시조카들의 졸업과 입학을 축하했다. 크고 좋은 과일이 선물로 들어오면, 그중에서 제일 크고 제일 동그란 것을 골라 차례상에 올리자며 시가에 가져갔다. 동서들과 삼색 나물을 무치고 녹두전을 부쳤다.

나중에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스스로에 대해 의아해했다. 치열하게 싸운 후, 배우자의 가족 대소사에 가서 앞치마를 두르고 태연하게 설거지를 하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기이하기까지 하다.


시할아버지 제사가 있던 어느 날이었다. 오전에 여자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었다. 죽은 사람이 먹을 음식만 준비하면 되었기에 음식 만들기는 오전 중에 끝났다. 시어머니가 고생했다며 나가서 짜장면을 먹자고 했다.

가까운 중국 음식점에 가서 짜장면을 한 그릇씩 먹고, 시가로 다시 돌아왔다. 동서들은 두고 온 자기 짐을 챙기러 올라갔고, 나와 시어머니는 건물 앞 길가에 서서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때도 나는 배우자와 어떤 문제로 다툼 중이었고, 시어머니는 그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며 오전 내내 한 공간에 있었지만, 얼굴이 밝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챘을 것이다. 둘만 남겨지니 딱히 할 이야기도 없어 나는 시어머니와 멀찍이 떨어져서 괜히 남의 집 화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체념해.


그날 시어머니는 나를 단어 하나로 죽였다.

체념.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함.

말은 힘이 세다. 말에는 가시가 있어서, 어떤 말은 갚숙히 박혀 도무지 빠지지 않는다.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어떤 말은 사람을 희망을 버리게 한다. 어떤 말은 사람을 죽인다.

그날 나는 체념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가혹하고 잔인한 말인지 알게 되었다. 생소한 단어는 아니지만 평소에 흔하게 쓰이지도 않는 두 음절의 단어, 체념. 정말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체념, 체념, 체념.


집으로 돌아와 그 단어를 곱씹었다. 시어머니의 목소리로 재생하는 동안, 두개골에 못처럼 박혔다. 탕탕탕, 망치질 소리가 났다.


자신처럼 살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체념하며 살았다.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지도 주장하지도 않았다. 발언권이 없었고 나서지 않았다. 가부장의 권위에 언제나 순응했다. 수동적이었다. 가정의 대소사는 가장이 결정했고, 그녀는 그 결정에 따랐다. 체념하는 삶이었다. 그녀의 체념 덕분에 시끄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한 사람이 이기고 다른 한 사람이 계속해서 져야만 유지되는 평화.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정해진 시시하고 지긋지긋한 게임. 시어머니는 나에게도 그러라 권유했다. 시어머니처럼 나도 체념하면 그래, 내 가정도 그녀가 일군 가정처럼 조용할 것이다. 화는 두고두고 내 가슴속에 쌓이고 곪고 썩고 진물이 날지언정 남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가정의 모습은 유지될 것이다.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체념을 한 채 지내왔음을 알아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하지 않는 것들, 차갑게 식은 마음, 나는 이미 너무도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남은 것들마저 체념하라고 말했다. 다 포기하고 이미 내 손에 쥔 것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본 사람의 입에서 그 끔찍한 말이 나왔다. 마지막까지 손에 쥔 것마저 탈탈 털어버리고 체념하기엔 내게 남은 날들이 많았다. 고작 체념 따위로 채우며 살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그녀만큼 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체념을 한 그녀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내게 체념을 권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속내를 내게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수시로 내 앞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고작 체념 따위를 권유하다니, 순식간에 마음이 차가워졌다. 대놓고 폭언을 퍼부었던 시아버지보다 고요한 표정으로 ‘자, 우리 함께 체념을 하자.’라고 한 시어머니에게서 더 큰 치명상을 입었다. 시아버지의 막말은 죽을 만큼은 아니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시어머니가 짧게 내뱉은 한 마디에 나는 죽었다. 그 말을 듣기 전의 나는 죽었다.

내가 아무리 전을 부친들, 그녀를 측은하게 여기든, 애써서 무슨 노력을 하든, 발악하듯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울부짖든, 그녀가 절대 내 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연민을 접었다. 나는 그녀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더는 전을 부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설날 아침 그녀에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 마음에도 없는 의례적인 말을 하며 절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좀 이해해 달라거나 인정해 달라거나 내가 그동안 해온 성과와 노력을 조목조목 늘어놓으며 내 편이 되어달라 했던 아우성도 멈췄다


다음 명절부터 나는 시가에 발을 끊었다. 처음엔 동서들이 와서 가자고 팔을 끌었는데 거절했다. 체념하지 않은 나는 전을 부치지 않는 명절 연휴에 조용한 이층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작가가 되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녀가 먼저 체념 대신 저항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부당한 일은 부당하다고 하거나 자신의 의견이 더 옳다고 생각이 되면 끝까지 목소리를 내었더라면 어땠을까. 작은 것부터 변화시켰더라면, 여자에게도 목소리가 있다고 같이 연대했더라면, 그러면 내 싸움이 좀 덜 힘들었을까. 아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누구나 스스로 선택한다. 체념할지 저항할지 그래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 나는 무엇을 잃고 대신 무엇을 얻게 될지 분명히 알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더 잃을 것이며 무엇을 더 갖게 될 것인지도 알 것 같다. 내가 얻은 가장 큰 것은 ‘나’로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 내 선택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다.

체념? 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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