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2

by 함지연

음료는 뭐로 드릴까요.

그녀 등 뒤의 메뉴판을 찬찬히 훑어보았어요.

글쎄요.

서른두 개의 메뉴 중에서 선뜻 고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주인은 따뜻한 음료를 권해요. 메뉴를 새로 추가했는지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벽면에 동글동글 구부러진 필체로 ‘유자 얼그레이차’와 ‘레몬 생강차’라고 쓴 종이가 두 장 붙어 있어요.

유자 얼그레이차는 어때요. 날씨가 쌀쌀하니 따뜻한 음료가 좋지 않을까요.

얼그레이차는 마셔본 일이 없어요. 더군다나 유자와 얼그레이를 섞은 맛은 어떨까 상상이 안 되지만 그걸로 주세요, 하고 순순히 대답해요. 유자 얼그레이차는 4000원이래요. 처음 마셔본 음료가 입에 맞지 않아도 다 마실 거예요. 기껏 권했는데 남겨버리면 그녀는 마음이 상할 거예요.


나는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요. 음료가 만들어지면 그녀가 직접 가져다줄 거예요. 바삭한 크래커 몇 조각을 담은 작은 종지도 함께 나와요. 다른 카페는 대부분 셀프서비스라서 진동 벨이 울리거나 카운터에서 부르면 완성된 음료를 받으러 가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앉아서 기다리면 옻칠한 나무 쟁반에 받쳐 자리로 가져다주니 대접받는 기분이에요.


창가에 앉아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마을버스에서 내린 누가 신호등이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향해 빠르게 뛰어가요. 그 옆을 스치듯 엇갈려서 또 다른 누가 한 손으로 전화를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전거를 끌고 가요.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요. 입 모양을 골똘히 보며 무슨 말을 하는지 혼자 맞혀보기도 하며 주인이 음료와 과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내 자리로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는 동안 지나가는 누구도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지 않아요. 하염없이 바라봐도 시선이 부딪쳐서 민망해지는 일은 없어요.


어머님, 제가 왜 이 카페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친절한 주인과 한적한 실내도 물론 좋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로 흡연실이 있다는 거예요. 사실 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여기 왔거든요.

요즘엔 어딜 가든 금연구역이라 눈치 보지 않고 맘 편히 담배 한 대 피울 곳 찾기가 쉽지 않아요. 물론 담배 연기 때문에 누군가 코를 틀어막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원치 않죠. 규모가 큰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 개인 찻집에서 이렇게 흡연실을 갖춘 곳은 매우 드물어요. 그녀는 역시 카페가 입주해 있는 건물의 주인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쩜 이렇게 흡연실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을까요.


언젠가 갔던 3층짜리 프랜차이즈 카페의 흡연실은 정말 엉망이었어요.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적나라한 부스 안은 환기가 전혀 되지 않아 연기가 자욱했고 편히 앉을 의자도 없었죠. 멋도 뭣도 없는 커다란 쓰레기통만 가운데 떡하니 있더라고요. 제때 비우지 않은 쓰레기통은 담배꽁초와 함부로 뱉은 침 때문에 얼룩지고 악취가 나서 인상이 찌푸려졌어요. 불결한 쓰레기통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는 서둘러 나와야 했죠.

이 카페의 흡연실은 아늑해요. 여기 있으면 작게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더욱 속삭임처럼 들리죠. 마치 물속에 잠긴 것 같아요. 늦더위가 이어지더니 요 며칠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어요.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힙니다.

말랑말랑한 쿠션의 의자도 두 개 있어요. 같이 담배를 피울 누군가 있다면 서로 담뱃불도 붙여주며 나란히 앉아 있으면 좋겠어요. 슬리퍼를 벗고 빈 의자 위에 발을 올려 무릎을 끌어안아요. 나는 길고 깊은숨을 쉽니다.

아까 음식 준비할 때부터 속이 좋지 않았어요. 어머님 집에 도착해서부터 줄곧 모든 것이 뒤섞인 냄새를 맡아야 했지요. 고사리와 시금치를 삶고 데치는 냄새, 핏물을 빼기 위해 물에 담근 소갈비의 피비린내, 지지고 볶는 콩기름 냄새, 퀴퀴한 걸레 냄새, 붙이거나 바르거나 복용하는 약품들의 냄새, 사람이 오래 산 집의 냄새까지 한꺼번에 맡으며 속이 울렁거리더라고요. 어머님 집의 모든 창은 작아서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잖아요. 언제 가도 묵은 냄새들이 고여 있지요.


어젯밤, 계속 못 자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깐 눈을 붙였어요. 알람을 끄고 5분만 누웠다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깜박 잠들어버렸지 뭐예요. 그러다 퍼뜩 깨어 서두느라 아침에 뭘 챙겨 먹을 시간이 없었어요. 어차피 민이와 민이 아빠는 아침을 거르고 점심때쯤 일어나 어머님네로 바로 올 거라 새로 밥을 하지 않았고요. 집에 언 식빵이나 찬밥도 없었어요.


점심부터 대가족의 밥상을 차리려면 서둘러야 하죠. 좀 늦으면 어머님이 언짢아하시잖아요. 왜 아직 안 오느냐 성화하시니 최대한 빨리 가야 했어요.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머님은 욕실에서 녹두를 씻고 계셨고 형님도 진작 도착해서 무릎걸음으로 걸레질을 하고 있었어요. 내가 또 늦어버렸지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매번 하는 사과를 또 했지요.


검정 비닐봉지가 콱콱 들어찬 냉동실을 한참이나 뒤척이던 어머님이 아무리 찾아도 치자가 없다고, 분명 지난 설에 쓰고 남은 치자가 다섯 개쯤 있을 텐데 없다고 탄식하셨을 때 그러면 제가 시장에 가서 사 올게요, 하고 얼른 나섰어요. 치자 찾기를 포기한 어머님이 냉동실 문을 도로 닫으며 그러면 간 김에 파도 모자랄 거 같으니 대파 한 단과 눌린 두부도 함께 사 오라고 하셨을 때 앞치마를 풀어 식탁 의자에 걸쳐놓고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그랬죠. 담배를 피우고 싶다, 숨을 좀 쉬고 싶다, 마침 그런 참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