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3

by 함지연

주민센터에서 요가를 배운 적이 있어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 수업인데 한 달에 수강료가 만 원이에요. 선생님의 시범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면 수강생 사이를 돌아다니며 비뚤어진 자세를 고쳐 주곤 해요. 자, 이번에는 나무자세를 할게요. 그러면 한 다리로 서서 합장한 채 유지해요. 다음엔 물고기 자세를 해봐요. 그러면 천장을 보고 누운 채 팔꿈치를 밀어 가슴을 펴요. 수업의 가장 마지막은 언제나 사바아사나, 송장자세예요. 몸에 힘을 빼고 누워 있는 거죠.


내가 한 다리로 서 있거나 팔꿈치로 버티거나 송장처럼 누워 있을 때 요가선생님이 가까이 다가와서 왜 숨을 안 쉬느냐고 물었어요. 숨을 안 쉰다니요. 그럼 나는 이미 죽은 건가요. 죽은 채로 여태 돌아다닌 건가요. 손이 차가운 여자였는데, 내 복부에 자신의 찬 손을 얹고, 다섯 번 수를 셀 동안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다시 다섯 번 수를 셀 동안 숨을 뱉으라고 했어요.

귀에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도록 크게 숨을 쉬어봐요, 회원님.

석 달을 다니며 그녀에게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참지 말고 호흡하라는 거예요.

난 이제까지 숨을 제대로 쉬는 법도 모르고 살았나 봅니다.


담배를 피운 지는 3년쯤 되었어요. 외출했다 돌아오면 벗어 놓은 운동화 밑창에 으깨진 꽃잎이 들러붙어 있던 무렵, 봄부터죠. 여의도나 어린이대공원에서 벚꽃 축제할 때 피는 자잘한 그거 말고요, 송이가 더 크고 풍성한 겹벚나무요. 그 꽃은 소란스러운 축제가 끝나고 나서 비로소 피기 시작해요.


우리 아파트 단지 입구에도 겹벚나무가 한 그루 있잖아요. 어머님도 바람에 꽃잎이 우수수 날리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참 곱다, 이 꽃이 뭐냐 하신 적도 있어요.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 아래에서 내가 어머님 사진도 찍어드렸는데 기억하세요. 나무 아래 서 있는 어머님과 좀 떨어진 나 사이를 남자애 둘이 빠르게 휙 지나가기도 했죠. 뛰어가며 그중 한 아이가 친구에게 물었어요. 야, 너 벚꽃 꽃말이 뭔지 아냐? 그러자 다른 아이가 진지하게 대답했어요. 어, 벚꽃. 나는 한참을 킥킥댔어요. 내가 웃음을 오래 멈추지 않자, 얘가 왜 이래하고 어이없어하다가 어머님도 피식 웃었는데 기억하세요.


웬일로 그날은 내가 어머님과 소원하지 않았는지 사진을 찍어 드리겠다고 자청했죠. 가까이에서도 찍고 멀리서도 찍고 여러 장 찍은 후, 인화해서 갖다 드렸지요. 어머님은 늙으면 사진이 밉게 나오는데 잘 나왔다며 마음에 들어 하셨지요. 나중에 영정사진으로 쓰고 싶다고도 하셨고요.

내 신발에 묻어왔던 건 바로 그 꽃잎이었어요. 그러니 담배를 처음 피운 건 분명 겹벚나무 꽃잎이 다 지고 난 4월 말쯤이에요. 어머님, 겹벚꽃의 꽃말은 ‘정숙’이에요.


처음엔 하루에 두 갑도 피우고 세 갑도 피웠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하루에 한 갑만 피우기로 다짐했고 지키려고 노력 중이에요.

뭐를 먹으면 어디에 암이 생긴다거나 또는 뭐를 먹으면 어디에 암이 안 생긴다거나 그런 말을 인이 박히도록 들을 때마다 앞에선 네 하고 뒤로는 흉을 봤는데요, 살 만큼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얼마나 더 살려고 노인들이 저렇게 악착스럽나 이해를 못 했는데요. 그런데 나도 나이가 들긴 했나 봅니다. 내 몸 아픈 것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거 보면 말입니다. 지끈거리는 편두통이 쉽게 가라앉지 않으면 뇌종양인가 싶고 가슴께가 뻐근하면 유방이나 폐 아니면 다른 내장 어딘가에 암이 생겼나 싶어 덜컥 겁이 나요. 이제까지 살며 미련스러울 만큼 참는 거밖에 한 게 없는데, 지금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그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요?

이렇게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오래된 기억과 묵은 감정들이 슬금슬금 떠오르곤 해요. 그것들은 눈밭에 눈을 굴리듯, 점점 더 커지고 딱딱해지기만 하지 도무지 작아지지 않아요. 그러다가 난데없이 퍽 하고 뒤통수를 때리죠.


유년시절, 제사 때문에 할머니 집에 다니러 갔던 한 날이 생각나요. 나는 오줌을 누러 뒤꼍으로 갔다 장독대 뒤에 쪼그리고 앉은 여자를 봤어요.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이리 와.

말없이 손짓하던 그녀는 그대로 우뚝 서 있는 내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어요.

그때 아버지와 불화했던 어머니는 집을 나가 따로 살고 있었죠.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따라 들어왔던 여자였어요. 체구가 작고 몸에서 화장품 냄새가 나는 여자였죠. 몇 달을 같이 살았지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그날 처음 보았어요.


이리 와, 은희야.

담배를 피우는 여자가 너무 낯설었죠. 마르고 조그만 여자가 우리 집에 처음 들어설 때도 이제부터 새엄마라고 부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생경한 기분은 아니었을 겁니다. 지금이야 교복 입은 여자애들도 스스럼없이 담배를 피우지만, 담배 피우는 여자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여자 옆에 쪼그리고 앉았어요. 다가가기가 어색했을 뿐 팔꿈치를 부딪치며 가까이 있으니 다시 다정하게 느껴졌어요.

너도 피워볼래?

여자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내밀었어요. 거기 빨간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죠.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저 담배의 립스틱 자국을 골똘히 바라봤어요.

잘 봐, 재밌는 거 보여줄게.

여자가 담배를 물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어요. 그리고 입으로 동그란 구름 모양을 만들었지요. 구름은 눈앞에서 빠르게 흩어졌어요.


이거 피우면 기분이 좋아져. 슬프고 속상했던 마음도 다 사라져.

정말요?

정말.

여자는 항상 붉은 립스틱을 바르죠. 하얀 피부에 붉은색이 잘 어울렸어요. 립스틱 자국이 선명한 담배를 입에 댔어요. 여자가 나를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가 숨을 길게 내뱉었죠. 그녀가 하라는 대로 따라 했어요. 그렇지만 숨을 들이마시기도 전, 연기 때문에 목이 맵고 기침이 터져 나왔죠.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어깨를 떨며 소리 내지 않고 웃었어요. 울 것 같던 여자를 웃게 만들어서 기침을 하면서도 난 좋았어요.

아줌마 담배 피우는 거 비밀이다?

난 고개를 끄덕였어요. 눈을 감고 연기를 내뱉는 여자의 얼굴이 슬프고 속상해 보여서 어쩐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눈을 뜬 여자가 내게 입을 맞추었어요.


(2019년 문장웹진에 발표했던 소설입니다. 발표당시의 제목은 '담배'이며, KBS라디오문학관에 드라마로 각색 후, 방송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