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4

by 함지연

두 대째 담배를 피우러 흡연실로 들어왔어요. 지금 내가 앉은 의자 앞에는 아주 작은 탁자가 있어요. 그 탁자 위에 젖은 원두찌꺼기가 담긴 납작한 접시가 있죠. 다 피운 담배꽁초를 거기 비벼 끄면 돼요. 원두찌꺼기가 탈취에 좋은 건 아시지요.


지난번에 제가 원두찌꺼기로 탈취제 만들어 드린 거 잘 사용하고 계신가요. 신발장에도 넣고 냉장고에도 넣고 서랍장에도 넣으라고 일러드렸는데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다이소에서 파는 다시백 한 통과 원두를 담아 꽁꽁 여밀 노끈 한 묶음 이렇게 두 가지만 있으면 탈취제를 넉넉하게 만들 수 있어요. 별 재주 없는 나도 눈 감고 만들 수 있을 만큼 아주 쉽죠. 혹시 직접 만들어 볼 생각이 있으면 원두찌꺼기는 꼭 그늘에 넓게 펼쳐서 바싹 말린 다음에 사용하세요. 젖은 원두찌꺼기를 그대로 사용하면 곰팡이가 펴요.


접시 옆에는 향초도 켜두었어요. 깍두기처럼 썬 알록달록한 조각들이 박힌 예쁜 초예요. 일렁이는 작은 불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져요. 초에서는 기분 좋은 냄새도 납니다. 어떤 향인지 이따 나가면 물어봐야겠어요. 언젠가는 페퍼민트 향이 언젠가는 로즈마리 향이 났는데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이 향은 무엇일까요.

흡연실 안까지 세심하게 꾸며 놓은 것을 보면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집에도 분명 예쁜 접시와 좋은 냄새가 나는 초가 있을 거예요. 집어던져도 절대 이가 나가거나 깨질 일 없는 오래된 스텐 주발에 밥을 먹지는 않을 거예요.


장독대 뒤에 숨어 담배를 피우던 여자처럼 눈을 감아봅니다. 슬픈 일이 연기처럼 사라져. 여자가 내 귓가에 속삭였죠. 길게 숨을 마시고 다시 숨을 내쉽니다. 입을 동그랗게 모아 작은 구름 모양을 만들어 봅니다.

여자는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아침에 계란을 부쳐서 간장으로 밥을 비벼줬던 그녀는 학교에 다녀오니 집에 없었죠. 사람이 만나면 헤어지는 건 물론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최초의 이별도 아니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숱한 이별을 했지만, 느닷없이 닥친 그 헤어짐이 가장 아팠어요. 떠날 거라는 아무런 신호도 미리 감지하지 못했으니까요.


어머니도 나를 버렸지만, 어쩌면 날 버릴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싸웠어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게 모질게 화풀이를 했고요. 그러니 어머니가 집을 나가떨어져 살게 되었을 때도 실은 괴롭지 않았어요. 밥 먹듯 악쓰는 소리며 살림이 내던져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은 고요했어요. 등짝을 때리지도 않고, 머리통을 쥐어박지도 않고 지 애비 닮은 년이라는 모진 욕도 하지 않는 사람. 시장에 데려가면 언제나 솜사탕을 사주는 새엄마가 생겨서 나는 좋았어요.

여자는 머리를 묶어주며 방울이 달린 머리끈을 새로 사주겠다고 약속했지요. 은희야, 너는 어떤 색을 좋아하느냐 물었고 난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대답했지요. 그러면 보라색 방울이 달린 머리끈으로 사주겠다고 여자는 약속했지요. 나는 연두색을 좋아해. 그녀는 명랑하게 말했지요.

강촌 어디쯤, 기차역에서 내려 한동안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그녀의 부모가 사는 집 앞에는 얕은 천이 흐르는데 더워지면 그곳으로 물놀이를 가자고도 했어요. 기차 안에서 사이다를 사 먹자고도 했지요. 그렇게 가버릴 거였으면 나중에 뭘 하자 이런 약속 같은 건 하지나 말지. 설레며 기대했던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녀가 야속했어요.


그녀를 오래 기다렸지만 다시는 볼 수 없었고 대신 따로 살던 어머니가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지금 부모님은 번갈아 만성 질환을 하나씩 얻어가며 같이 살고 있어요. 어머니에게 골다공증이 오고 몇 달 후 아버지에게 당뇨가 오고, 다시 어머니가 관절염이 앓으면 얼마 후 아버지가 고혈압 진단을 받는 식으로요. 아마도 누군가 먼저 죽을 때까지 병든 일상을 함께 보내겠지요. 소리 나지 않는 총이 있으면 진작 쏴 죽였을 거라고 서로를 증오하면서 말이에요. 그런 악담을 퍼붓는 쪽은 주로 어머니지만 아버지 속내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난 오랜만에 본 어머니에게 매달리기는커녕 쭈뼛거리며 피했답니다. 돌아온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실망했는데 그 마음을 들킬까 봐 겁이 나서 어머니와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거든요. 어머니가 아버지와 싸운 후 아예 집을 나가거나 아니면 병에 걸려 죽거나 하면 여자가 돌아오려나, 다시 온다면 이젠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고 새엄마라고 불러 그녀를 기쁘게 해 줄 텐데, 이런 생각이 들면 혼란스러웠고,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죠.


때로는 여자가 아무도 모르게 나를 데리러 오는 상상을 했어요. 그녀는 나와의 약속을 절대 잊은 게 아니었던 거죠. 잠든 내 어깨를 살살 흔들어 깨운 그녀와 함께 까치발로 몰래 집을 빠져나오죠. 우리는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요. 그리고 강촌에서도 더 들어가는 어느 ‘깡촌’에서 나는 손가락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자맥질하고, 돌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그녀는 담배를 피우는 거예요. 그러다 물속의 나를 향해 여자가 손을 흔들죠.

이리 와, 은희야.

그녀는 오소소 소름 돋은 내 어깨 위에 마른 수건을 둘러주고 사이다를 함께 마신 다음, 일부러 트림을 크게 하며 깔깔 웃어요. 그러고는 그녀 옆에 누워 따뜻한 돌 위에서 몸을 말리는 거예요.


흡연실에서 나오니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네요. 어머님, 그새 전화하셨군요. 언제쯤 오나 궁금하신 거겠죠. 형님과 둘이서 고사리 무치고 산적 양념하느라 분주하신가요. 아니면 줄이 너무 길어서 여전히 눌린 두부를 못 사고 있을까 봐 신경 쓰이나요. 유자 얼그레이차를 다 마시고 나면, 충분히 담배를 피우고 부대끼는 속이 가라앉으면 들어갈 텐데요.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팬 북어도 조리고 당면을 삶고 볶고 버무려서 잡채도 만들 텐데요. 다라이 한가득 만든 녹두전 반죽도 싹 다 부칠 텐데요. 염려 마세요, 어머님.

유자청을 넣은 얼그레이는 적당히 달고 따뜻해요. 입에 안 맞으면 어쩌나, 남기면 저이가 속상할 텐데 이런 걱정을 했는데 기우였어요. 다음에 와도 커피 대신 카페의 서른세 번째 메뉴인 유자 얼그레이차를 주문해야겠어요.


언젠가 어머니가 노래교실에 가고 집에 아버지와 둘이 있던 날 물은 일이 있어요.

아줌마 이름이 뭐였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반응이셨지요. 누구? 누구라고? 자꾸 묻자 그런 일은 없었다고 네가 너무 어릴 때라 뭔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라며 딴소리를 하더라고요.

같이 뜯어 먹은 솜사탕에 묻은 립스틱 색깔도, 그녀가 피우던 담배 냄새도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요. 나란히 쪼그려 앉은 장독대 옆에 있던 나무가 탱자나무였다는 것도, 촘촘한 가시 틈에 익지 않은 탱자가 동글동글 매달린 것도 다리에 쥐가 나서 어느 순간 일어나 콩콩 뛰기도 했던 것도 나는 잊어버리지 않았는데요.

나는 이 모든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의 기억은 절대로 왜곡된 것이 아니다 하고 정색하자 아버지는 네 엄마는 나가기만 하면 들어올 생각을 안 한다고, 점심에 밥을 안 차려준다고, 어쩔 때는 저녁때가 지났는데도 밥을 하러 들어오지 않는다고, 지금도 봐라, 노래교실 끝난 지 한참이나 되었는데 아마 어디 가서 노닥거리는 모양이라며 어머니 험담을 오래 하더니 아예 딴 데로 가버리셨죠.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누군가 자주 이름을 불러줄까요. 어딘가에서 무탈하게 살고 있을까요. 혹은 병을 얻어 죽어가거나 아니면 이미 죽었을까요. 죽었다면 한참 앓지 않고 많이 아프지 않았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