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환갑잔치

by 함지연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초등학교가 아니라 무려 국민학교이다), 할아버지의 환갑잔치가 열렸다. 그때에는 환갑잔치를 성대하게 치르던 때였다. 큰며느리인 엄마가 그 잔치를 치르느라 고생이 많았다. 집성촌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마을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손님이었다. 방과 마루와 마당까지 상을 폈고 손님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광대와 기생 몇 명도 불러서 장구를 치며 노래했고 종일 동네가 떠나갈 듯이 왁자했다.


서울에서 이런저런 음식들을 미리 장만해서 실어 나르기도 했지만, 당일이 임박해서는 부엌과 앞뒤 마당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앉아서 잠깐 쉴 여유도 없었다. 엄마를 비롯한 친척 여자 어른들이 총출동해서 음식을 만들었다. 그녀들은 부엌과 뒷마당, 앞마당 그리고 방을 오가며 분주했다.


환갑 상차림은 앞마당에 차렸다. 크고 긴 병풍을 두르고, 며칠에 걸쳐 만든 음식이 상 위에 놓였다. 과일과 옥춘 같은 붉은 과자도 탑처럼 쌓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직계가족들이 모였다. 가장 가운데 새로 맞춘 한복을 차려입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앉고 주위를 자손들이 둘러서 앉거나 섰다. 막내 고모가 20대 초반쯤, 삼촌들도 아직 미혼이었다. 나와 형제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앉았다. 삼촌 둘만 빼고는 모두 한복을 입었다. 사진 속에는 지금은 헐어서 사라진 할머니 집이 병풍 뒤로 반쯤 나와 있다.


엄마의 환갑잔치는 둔촌동에 있는 별나라예식장에서 했다.

엄마는 환갑 생일을 크게 하기를 원하셨다. 가족 중 유일한 외향인이었던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 막 60이 된 엄마에게는 각종 모임이 있었고 우리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매우 많은 친구가 있었다. 그들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오래 못 살 것 같으니 환갑잔치만은 크게 하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극내향인인 자녀들은 반대하지 못했다. 할아버지 환갑 때처럼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기생도 몇 명 왔다. 사회자가 자식들에게 돌아가며 노래를 한 곡씩 하라 시켰을 때는 정말 부끄럽고 창피하고 괴로웠다. 내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엄마의 그 많은 친구분들과 왕래가 뜸하거나 먼 친척들(엄마의 6촌 오빠 가족들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보려 해도 나는 처음 보는 분들 같은데)까지 모두 왔고 식사를 하는 자리를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네가 큰딸이구나,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 어른에게 미소를 지은 채 와 주셔서 감사하다며 반절을 하고 다녔다.

자녀들은 이날을 위해 광장 시장에 가서 한복을 맞춰 입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때처럼 병풍 앞에 차린 환갑 상차림 앞에서 앉거나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 내가 안고 찍은 아들이 벌써 스물네 살. 엄마는 환갑잔치 이후에도 여행도 다니고 새 친구도 사귀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으며, 칠순과 팔순을 지났다. 다행히 칠순과 팔순 잔치는 크게 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셔서 가까운 친척들과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나와 형제들에게 별나라 예식장에서의 환갑잔치가 굉장히 고단하고 힘든 일이었기에(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극내향인이다. 어쩌다 보니, 새로 생긴 가족 구성원 역시 내향인이다) 간단히 하자는 엄마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내가 나이 오십 대 중반이 넘어서자 동생들은 나에게 장난을 쳤다. 환갑잔치는 별나라예식장에서 하라고. 기왕 하는 거 밴드도 불러 돌아가며 노래도 부르고. 이왕 하는 거 한복도 맞춰 입고. 우리의 대화에 종종 등장했던 별나라예식장은 몇 년 전, 폐업했고 아쉽지만 내 환갑잔치를 그곳에서 할 가능성은 아예 사라졌다.

만으로 60이 되는 내년, 나의 환갑잔치는 어떻게

진행될까.

할아버지나 엄마의 경우와 크게 달라졌다. 두 분 모두 잔치를 열어줄 자녀들이 있었다. 자녀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가정을 이루고 손자가 여럿 있었다. 엄마의 환갑 기념사진에는 일곱 명의 손자가 있다. 나는 일곱 명은커녕 한 명의 손자도 없다. 큰딸이 서른이지만, 아직 미혼이다. 안타깝지만 경제적인 독립도 쉽지 않다. 취업 못한 자녀가 있는 경우도 더러 있고 취업에 성공했더라도 그야말로 자기 살기 바쁘다. 극단적으로는 30대에도 여전히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다는 경우도 보았다.

환갑을 맞이하는 당사자의 삶은 또 어떤가. 평균 수명이 늘며 우리의 예순은 부모 세대의 60과 확연히 다르다. 퇴직 후, 자녀들은 대부분 독립하거나 결혼했고 그야말로 여생을 즐기던 그들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생업에서 은퇴하지 않았다. 또는 못했다. 평생 해왔던 일에서 퇴직했더라도 제2의 일자리를 찾아 경제활동을 한다. 늘어난 수명만큼 살아가는데 필요한 노후자금은 부족하고, 성인 자녀들은 독립하지 못했다. 또는 안 했다. 부모 집에 얹혀사는 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독립하는 순간, 궁핍해질 것을 우리 자녀들도 잘 아니까. 그들은 그들끼리 모여 최대한 오래 부모 집에서 버티기로 모의라도 한 것일까.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순간,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치약이 얼마나 비싼지, 두루마리 휴지는 왜 그렇게 헤픈지, 혹한기에는 가스요금이 혹서기에는 전기요금이 생활비에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독립하지 않은 그들은 독립 후의 생활을 시뮬레이션해 보며 캥거루족이 되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독립하지 못한 자녀가 셋이나 있는 나의 삶도 다르지 않다. 결혼 후 대외적으로는 전업주부였지만, 그때도 이혼한 지금도 경제활동 중이다. 경제활동을 중단하고 여생을 보내기로 한다면, 고령기에 접어든 내게 경제적인 빈곤이 찾아올 것은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돈을 버는 행위는 앞으로도 중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투자도 하고 고정 알바도 하며 다양한 경제활동 중인데 그렇게 얻은 수입이 내 삶을 좀 더 품위 있게 해 주니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다. 자녀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에 수입까지 제로라면 나는 분명 의기소침해질 것이다. 정서적인 독립과 더불어 경제적인 독립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나면 서로에게 서운할 일도 노여울 일도 없다.


친구와 각각 10만 원씩 매월 20만 원을 모으기 시작한 지 5개월째. 벌써 100만 원이 모아졌다. 적립식 펀드 상품인데 오늘의 수익률은 6%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우리는 캐나다에 가기로 했다. 오로라도 보고 호수도 보고 올 예정이다. 공원과 숲과 골목을 걸어 다닐 것이고, 노천카페에 앉아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사람들을 하염없이 구경할 것이다.


친구도 나도 곧 환갑을 맞는다. 우리가 계획한 여행은 일종의 환갑잔치이다. 본인이 직접 짓고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집 마당에서 환갑잔치를 했던 할아버지. 각별한 사람 모두를 불러 별나라예식장에서 환갑잔치를 했던 엄마. 그리고 3세대인 나의 환갑잔치는 무려 캐나다에서 열리게 될 것이다. 60살 생일잔치를 위해 열 시간 넘게 하늘을 날아갈 예정이다. 심지어 내돈내산이다.


내 삶에서의 세 번째 환갑잔치, 그 주인공은 나. 독립적이고 씩씩한 60살 할줌마의 내돈내산 환갑잔치 후기를 기대해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