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행군

by 함지연

부산은 당일이나 일박 여행으로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3일은 머물러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좀 더 여유가 있다면 삼박 이상 여행하는 것도 좋다.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도 크고 인구도 많은 도시. 전철 노선과 버스 노선도 촘촘해서 뚜벅이 여행객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다. ‘도착정보 없음’이라고 표기된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경험이 있는 뚜벅이 여행자에게는 정확히 도착하는 전철과 버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하다.


해수욕장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처럼 부산 역시 골라서 갈 수 있는 해변이 있다. 부산에 갈 때마다 해변 중 한두 곳을 선택하는 것도 즐거운 고민이다.

부산 전철 노선표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부산 사람들은 좋겠네. 친구와 만날 때, 그 많은 해변 중에서 돌아가며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해운대와 광안리와 다대포, 송도. 영도까지. 다 같은 청록색 바다이지만, 각각의 매력이 있는 해변. 드넓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쩐지 마음도 드넓어질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실제로 부산시민들은 오히려 시큰둥할지도 모르지.

하긴 60년 차 서울시민인 나 역시 여러 이름의 한강공원을 실컷 이용할 수 있지만,

일 년에 몇 차례나 가려나. 자전거를 타면 30분 내에 도착하는 가까운 뚝섬 공원도 걸은 지 오래인 걸 보면.


방학 중인 아들(아들은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대안 학교에 재학 중이다)과 부산 여행을 하고 어제 집으로 돌아왔다.

오가는 기차표와 숙소만 예약하고 세부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첫날은 송도 해수욕장, 둘째 날은 송정 해수욕장에 숙소를 정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숙소 창가에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감천마을 야경을 보고, 야간 시티투어버스도 탈 예정이었다.

부산은 야경이 특히 아름다운 도시이다. 아찔하다는 부산항 대교를 통과하는 이층 버스를

타고 부산의 야경을 구경하면 아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나는 분명 눈을 질끈 감겠지만,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아들은 신나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갔던 월요일과 화요일은 시티투어 버스가 운행하지 않았다.

서울보다는 온도가 높았지만, 해가 지면 급격히 추워졌다. 바람이 불어 체감 온도는 더욱 추웠다. 나는 감천마을 야경을 좋아한다. 알록달록한 지붕이 있는 집들이 촘촘히 붙어있는 동화 같은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순간을 마주한다. 가장 먼저 반짝, 하고 가로등 불빛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캄캄했던 창문에 노란빛이 차례차례 켜진다. 그때가 정말 마법 같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 어두운 실내에 불을 켜는 순간이다. 불을 켜고 서늘한 실내에 난방을 올리고 저녁 밥상을 차리는 풍경이 작은 창문 안쪽에 펼쳐질 것을 상상하며 나는 마냥 서 있는 것이다. 마을 버스정류장 앞에 서서 그 따뜻한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이 좋다.

그렇지만 에너지가 넘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들은 가만히 있는 것을 힘들어한다.

감천마을에서 야경을 구경할 때뿐만 아니라, 어딜 가든, 정적인 상황을 견디지 못하니, 아들과의 여행은, 여유 있게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그야말로 행군이다.

이번 여행에도 나는 보폭이 크고 빠른 아들 뒤를 경보하듯 쫓아다녔다. 열심히 따라다녀도 100m쯤의 간격이 날 정도여서 너무 멀어지만 아들을 불러 세워야 했다. 3일 내내 하루에 2만 보 이상을 걸었고, 저녁이면 너무 피곤해서 오히려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3일이나 있었는데 카페는 한 군데도 가지 못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땐, 무조건 테이크아웃. 아들을 설득해서 카페에 들어간다고 해도 아마 한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나가버릴 텐데,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나서야 할 것이다.

청사포 산책로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카페는 결국 포기했다. 윤슬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계속 걷기를 우기는 아들 때문에 사진으로만 남겼다. 다음엔 혼자 와서 꼭 저 자리에 앉아서 바다를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바라봐야지. 폭신하고 편해 보이는 의자가 바다를 향해 놓여 있던 공간을 아쉬움 때문에 자꾸만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행군.


올해 스물네 살이 된 아들의 주 양육자는 나다. 주 양육자라기보다는 전담 양육자 또는 전담 보호자가 맞는 표현 같기도 하다. 24년간 아들을 양육했고, 앞으로도 보호자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 여행 중, 아들과 한번 싸웠던 일이 있는데, 일회용 면도기를 사용하다 살을 베인 것 때문이다. 아들은 면도기 사용에 서툰 스스로를 자책하며 화를 냈고, 그런 아들을 보며 나도 화가 났다.


반복되는 상황에 화가 난 것이 맞다. 엄마인 내가 남자인 아들에게 면도기 사용법까지 가르쳐야 하는 상황. 남자가 남자에게 더 디테일하게 알려주고 교육할 수 있는 부분까지 내가 해야 하는 상황. 면접을 앞두고 정장에 넥타이를 매는 방법 등을 물어올 때 역시 나는 알려줄 수가 없었다. 지퍼형 넥타이를 구입해서 매긴 했지만,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벽 앞에 선 것 같다.


사실은 함께 거주할 때도 이혼을 한 이후에도 아들에 대한 양육을 나 몰라라 방치하는 전 배우자에게 화가 난 걸 수도 있다. 양육을 조금이라도 분담했더라면 내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도 좀 덜었을 것이다. 주말이나 방학 때만이라도 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지만, 아들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결국 방학을 해서 집에 있는 아들의 주 보호자로서 지낸다. 나보다 키가 30cm나 큰 아들을 양육하는데, 힘에 부친다. 아들이 크는 동안, 야속하게도 내 키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는 말다툼을 멈췄고, 나는 티슈로 아들의 턱을 지혈한 후, 밴드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일회용 면도기를 내 뺨에 대고 가만히 쓸어내렸다.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고 내게 그랬던 것처럼 면도기의 각도를 주의해서 아들의 턱과 코에 난 수염을 깎았다. 이런 느낌으로 살살하라고, 힘을 너무 주지 말라고 일러주고는 면도기를 건넸다.


태종대, 송정해수욕장, 청사포, 해운대, 송도 해수욕장, 자갈치 시장, 국제시장, 부평깡통시장, 보수동 헌책방거리. 아들과 내가 걸었던 길이다. 광역버스를 타고 부산항 대교를 건넜고, 마을버스를 타고 산꼭대기에 있는 감천마을에 갔다. 부산 1호선 전철을 타고 국제시장에 갔고 부산 2호선 전철을 타고 해운대에 갔다. 아들은 부산 전철 노선표를 검색해서 역명을 외우기 시작했다. 자갈치역이라는 이름이 재미있다고 했고, 수영역도 재미있어했다. 우리는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걸었다.


그런데 그렇게 걸었던 덕분에 새롭게 발견했던 풍경이 있다. 청사포에 있는 카페가 그랬고.

해안 산책로가 그랬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고, 다들 타보라고 추천했던 해변 열차나 스카이캡슐, 케이블카 대신 걸었던 덕분에 우리는 남쪽 바다의 초록빛을 눈에 가득 담아왔다. 움직이는 탈 것에 앉아 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는 건 더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바닷바람이 연이어 뺨을 스치는 몇 시간 동안의 걷기는 막힌 속이 다 뚫리는 기분이다. 송정해수욕장에서 시작해서 해운대까지 이어졌던 해안 산책로는 지금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답다. 예정에 없던 길이었고 이전에 알지도 못했던 길이었다.


100m쯤 앞서 걸었던 아들은 그 길을 걸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을까. 두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까. 100m쯤 뒤에서 걷던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좋다,라고 연신 생각했다. 걸어도 걸어도 내 왼쪽으로는 반짝이는 바닷물이 있었고 그게 전부였다.

너무 멀어진 아들의 이름을 가끔 불렀고, 그러면 아들은 뒤를 돌아보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주 멈춰서 바다와 마주했고, 그럴 때마다 내 귀에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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