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첩 반상을 차려 나를 먹였다

by 함지연

자고 일어나 보니, 아들은 벌써 외출하고 없었다. 어제저녁에 오늘 아침 메뉴는 미역국과 생선이라고 말하며 먼저 일어나면 깨우라고 했는데 일찌감치 나가버렸네. 아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다가 뜨겁게 데운 미역국이 먹고 싶어졌다. 나는 고기보다 조개나 황태를 넣고 끓인 미역국을 좋아한다. 그제 끓인 국은 끓일수록 점점 국물이 진하게 우러나서 맛이 훨씬 좋다. 마침내 이불속에서 탈출했다.

냉동실에 얼려둔 밥부터 해동했다. 냉동실에는 한 공기 분량으로 소분한 밥이 쟁여져 있다. 밤과 병아리콩, 팥을 넣어 만든 찰밥도 있고, 흰쌀밥 또는 현미밥, 그리고 당뇨에 좋다는 정보에 홀려서 몇 봉지나 산 루피니빈을 넣고 지은 밥이 있다. 오늘은 루피니빈을 넣은 밥을 먹기로 정했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3분이나 4분 정도 돌리면 뜨거운 김이 오르는 밥 한 공기가 완성된다. 얼마나 간편한지 모른다. 이 편한 방법을 이제야 누리고 산다. 갓 지은 밥(전자레인지에 돌린 밥 절대 안 됨)을 신앙처럼 고수한 전 배우자와 20년 넘게 살았다. 갓 지은 밥의 굴레에서 긴 시간 헤어 나오지 못했다. 밥을 지을 때마다 남는 밥이 있었고 그 밥을 처치해야 하는 건, 대부분 나였다. 그야말로 나는 찬밥 신세였다. 매번 끼니때마다 새로 밥을 하는 건, 내게 끔찍한 노동이었다. 휴일이면 세 번 압력솥의 추가 울렸고, 여행을 가도 압력솥은 필수 준비물. 이제 나는 일주일에 한 번만 밥을 하며 지낸다.


반찬을 덜어 먹는 방식은 매번 다르다. 넓은 접시에 반찬을 조금씩 덜어 차리기도 하고, 작은 접시에 따로따로 담기도 한다. 어디선가 가난한 집 특징 중 하나가 반찬통째 먹는 거라던데, 그럼 나는 가난한 모양이다. 설거지할 그릇이 줄기 때문에 반찬통째 먹는 날이 제일 많기는 하다. 오늘은 반찬을 전부 따로 담아 먹고 싶다. 그러고 싶은 날이다.

시금치와 시래기 나물을 접시에 담았다. 같이 일하는 플로리스트 중 한 명의 시가가 비금도다. 칼날 같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란 섬초를 나이 든 할머니들이 쭈그려 앉아 캔 비금도 섬초를 시가에서 보내왔다며 내게도 나눠주었다. 손맛이 필요 없이 재료만으로 이미 완성된 맛이다. 끓는 물에 넣었다 바로 꺼내 아삭하게 무친 시금치나물을 씹으면 입안에 단맛이 돈다.

지난겨울 부모님의 텃밭에서 수확한 배추와 무로 김장을 했다. 그때 무청을 따로 모아 말렸다(내가 아니라 어머니가). 정월 대보름 즈음, 그걸 삶아 주셨는데 국간장과 된장을 넣고 무쳤다.


마늘장아찌도 덜었다. 이제 작은 밀폐용기 한 개 분량만 남았다. 김치통 한가득 절인 마늘장아찌를 다 먹었다. 마늘장아찌를 먹는 건 나뿐인데, 그 많은 마늘을 사람이 되려는 곰처럼 먹었다. 그래도 줄지 않았다. 물릴 정도로 먹으며 반성하고 있다. 다시는 대량으로 절임 반찬은 만들지 않으리.


이건 5인 가족 살림을 20여 년간 하며 생긴 고치기 어려운 습관 중 하나이다. 전에 나는 햇마늘이 나올 때마다 지나다니는 마늘 장사 트럭에서 몇 접씩 샀다. 손이 쓰라리고 살이 까질 정도로 그걸 또 깠다. 집안일이 끝나고 늦은 밤에만 했더니 며칠이나 걸렸다. 그걸 씻고 말려 장아찌를 만들었고 갈아서 납작하게 편 다음 다진 마늘을 냉동실에 얼려 일 년 내내 먹었다.


마늘만 절인 게 아니다. 양파와 고추와 마늘종에 끓인 간장을 부었다. 끝물 딸기와 포도를 졸여 잼을 만들었다. 종일 걸리는 그 일들을 마치고 나면 종이 인형처럼 널브러졌다. 우스운 건,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었고, 긴 노동 끝에 완성된 유리 용기들을 쪼르르 세워놓고 혼자 뿌듯해했다는 것. 살림을 야무지게 잘한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최고의 상인줄 알았던 전업주부 시절의 일화들이다. 식구는 계속 줄어, 이제는 2인 가구가 되었으니 정말로 그만둬야겠다.


이사를 앞두고, 냉장고 털어먹기 중이다. 냉동실 구석에서 찾아낸 서리태를 한 번에 졸였다. 몸에 좋다는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사 가기 전까지 다 먹어야지. 끼니때마다 한 숟갈씩 먹으려고 하는데 역시 나는 콩이 싫어. 맛없어.

벌써 3월도 다 지나가는데, 김장 김치가 한 통 가득 남아서 이것도 얼른 먹어야 한다. 묵은 김치가 물리고 아삭아삭한 생김치가 먹고 싶다. 외출했다가 노점이나 마트에서 배추를 보면 한 통 사서 겉절이를 하고 싶은데 꾹 참는다. 월동무가 들어가기 전, 깍두기도 만들고 싶고, 시원하게 물김치도 먹고 싶지만 사지 않았다. 짐 줄여야 해, 짐.


그래도 이때 아니면 겨울까지 맛볼 수 없는 월동무 하나는 사서 무생채를 만들었다. 역시 재료 본연의 맛이 최고여서 누가 만들어도 맛이 없을 수가 없는 맛. 아삭아삭 씹히는 무의 단맛은 없던 밥맛도 돌아오게 한다.

김치찌개를 먹고 김치전을 하고 그다음 김치찜을 만든다. 이번에는 양념을 씻어낸 후, 들기름을 넣고 지졌다. 지짐을 다 먹고 나면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찌개를 해서 자취를 막 시작한 딸에게 한 통 가져다주어야겠다. 하는 김에 김치볶음밥도 만들어야겠다. 냉동실에 두고 먹으라고 소분해서 주면 퇴근하고 와서 밥 차려 먹기 편하겠지.


일곱 가지 반찬과 루피니빈밥 그리고 홍합 미역국. 후식으로 먹을 딸기를 씻었다. 식탁에는 꽃병에 프리지어 꽃도 한 다발 있어서 근사한 밥상이 차려졌다.


남을 위해 차리기만 했지, 정작 나를 위해 정성을 들여 차려 먹는 날은 몇 번이나 될까. 심지어 그때 최소한 10첩 반상의 밥상을 차리며 살았는데. 왜 나를 잘 먹이지 못했을까.


대충. 물이나 국에 말아 후루룩. 가족들이 먹고 남긴 반찬들. 식은 밥. 솥 바닥에 타거나 눌은밥. 가운데 살은 다 먹고 머리와 내장과 가시만 남은 생선. 지금 안 먹으면 상해서 버릴 나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나는 나를 홀대했다.


그때의 내가 떠오를 때마다, 서른 살의 내가 마흔 살의 내가 안쓰럽고 미안하다. 이불장 속에 들어가 혼자서 엉엉 울기도 했던 마흔 살의 나. 그때 따듯하고 보드랍고 새콤한 것들을 배부르게 먹여 줄걸. 미워하지 말걸, 한심해하지 말걸. 괜찮다고 할걸, 다 지나갈 거라고 할걸.


오늘 나는 일곱 가지의 반찬으로 나를 먹였다. 가족이 좋아하는 소고기 미역국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홍합 미역국을 끓였다. 예쁜 꽃이 있는 식탁에 앉아 반찬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콩도 꼭꼭 씹어 삼키고 진하게 우러난 국물도 달게 마셨다. 국이 맛있어서 두 그릇이나 먹었다. 몸속이 뜨거워졌다. 꽃잎 가까이 코를 대고 킁킁 프리지어 꽃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어떤 누구도 아니고 내가 나를 대접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어야 할 나 자신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자, 어쩐지 울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