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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Jun 16. 2018

도올의 로마서 강해

김용옥 지음. 통나무. 2017년

도올이 만나고 배운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의 사상체계가 어떠한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대학교 생물과를 다니다 병고로 인하여 낙향하고 함석헌 선생을 만났다. 보성고등학교 시절에는 독일어 선생으로 만난 허혁으로부터 “불트만 신학”을 배웠다.     


도올은 알버트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 라이마루스의 [역사적 예수의 역사학적 탐구]와 브레데의 [메시아 비밀], 스트라우스의 [비판적으로 검토된 예수의 생애], 르낭의 [예수의 생애] 등의 책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소위 꼴보수자들의 눈으로 보면 그는 신앙인이라기보다는 철학가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의 장광설은 끝없는 의심과 불신에로 나아가게 만들 뿐이다. 성경은 신화에 불과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옛이야기와 같은 담론일 뿐이다.     


도올은 로마서 본문의 강해보다는 서두의 장황한 가설들을 피력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가진 성경에 대한 입장은 소위 그가 말하는 꼴보수의 전통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파격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가득하다. 축자영감설에 대한 부정을 감지할 수도 있고, 예수와 바울의 관계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운 가설들을 가져와 설파하므로 기독교는 하나의 사상체계로 전락하고 만다. 도올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체계일 뿐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의 장황한 이야기들을 일부 발췌해 보았는데 이 정도만 보아도 그의 사고 저변이 어떠한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일까

유대인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중에서 유다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시대에 남쪽왕조가 유다왕국이었고 그들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이방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생겨난 명칭인데 그것은 헬레니즘 시대로부터 로마시대에 걸친 관례에 속한다.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유대인 중에서도 매우 제한된 지역과 관습과 세계관과 행동양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명칭일 수도 있다.    


예수시대에 팔레스타인은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대로 삼분되어 있었으며,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인이라 부르지는 않았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대인은 어디까지나 유대지역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며, 그 가치관이나 생활상의 규범이 다른 전승에 속했다. 유대인전승의 핵은 예루살렘 정통주의였다.    

북조 이스라엘이 BC720년 앗시리아 제국에 의하여 멸망하고, 악랄한 피정복민 이주정책을 시행한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10지파의 흔적은 말살되었다. 이후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은 남쪽의 다윗 왕 혈통을 계승한 유다왕국의 유다지파 중심으로 일부 시므온 지파와 베냐민 지파 정도만으로 계보가 이어졌다.    


그나마 유다왕조도 바빌로니아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바벨론으로 이주되어 민족 말살정책이 진행되었다. 유대인들은 야훼라는 유일신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가진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종교적‧정치적‧문화적 삶의 양식에 젖어있는 경건한 정통주의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모세가 아론의 지팡이로서 홍해를 가른 출애굽의 이야기를 장쾌한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하려는 괴이한 습벽에 사로잡혀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서문학의 주제를 역사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생각한 역사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된 사건들을 기술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윤리적 요구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기획의 실현의 과정일 뿐이다. 그리스인들은 역사의 중심에 정치를 두었다.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정치가들을 위한 교육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역사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있었다.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객관화되어 있는 사건들 속에 함장되어 있는 과학적 법칙 같은 것을 현재의 치자들에게 던지는 교훈으로 그려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 알파와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배타와 전쟁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바이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토라를 분석해 보아도 이스라엘 민족은 결코 유일신관을 가진 민족이 아니었다(불트만의 주장 [당대의 시대배경에서 본 원시기독교]).    


▶유일신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관계의 계약이 있을 뿐    

“너희는 나 이외의 다른 신들을 모시지 못한다.” 야훼 스스로, 야훼 이외의 다른 신들(엘로힘, 복수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야훼 스스로 다신론적인 풍토 속에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오직 나만을 섬기라고 클레임Claim 할 수 있는 계약의 당위성은 바로 출애굽이라는 민족적 사건의 주체역할을 야훼가 하였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이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이 사건을 대가로 야훼는 이스라엘민족의 “유일무이한 섬김”을 따낸 것이다.    


▶비브리칼 히스토리는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히스토리가 아닌 스토리일 뿐이다. (베들레헴의 어린 목동 다윗이 돌팔매 하나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목을 잘랐다. 그리고 그 힘을 빌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합한 최초의 왕이 되었는데 그것이 사실일까?)

(아브라함 이래의 족장들의 이야기는 과연 그 서술된narrative 순서대로 옛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1999년 이스라엘 성서고고학을 대표하는 텔아비브 대학 근동문화 고고학과의 저명한 고고학자 체예프 헤르초그(Ze’ev Herzog 1941~ )는 사계의 거대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하나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에 대한 하레츠(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일간지, 1918년에 창간됨. 그 영문판은 뉴욕타임즈 국제판과 함께 팔린다) 주간잡지의 겉표지 언어는 다음과 같다.    


홀리랜드로부터의 진실: 이스라엘 땅에서 70년 동안 수없는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계속해온 결과의 총결론은 매우 명백하다. 성서가 말하는 역사시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Truth from the Holy Land: After 70 years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Land of Israel it is clear that the biblical period did not exist.”    


그 논문의 제목 자체는 이러하다: “성서가 말하는 역사와 관련된 고고학적 발굴은 없다.” 그리고 그 논문의 부제는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족장들의 이야기(아브라함‧이삭‧요셉 등), 출애굽사건, 여호수아의 정복, 판관들의 이야기,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은 그냥 민담folk stories일 뿐이다. 이 사실을 학자들은 오랫동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사회는 이 진실을 은폐하는 것을 선호하여 온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자들이 양심적 고백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대표적 여류시인이며 송라이터이며 제2애국가의 작자이기도 한 나오미 쉐메르(Naomi Shemer, 1930-2004)는 이와 같이 말했다: “바이블의 이야기가 실제적으로 일어났는지 아닌지, 또한 바이블에 언급된 건물들이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 그러한 문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상징하는 바의 것이다. 바이블의 전승은 그것이 비록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역사적 실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엄연히 지속될 것이다.”    


유일신관의 채택: 바빌론 원점의 정치적 전략

아마도 우리나라의 구약학 학자들은 헤르초그의 양심적 발언에 대하여 쉐메르만큼이라도 여유있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구약의 이야기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우겨대며 온갖 반론의 잡설을 펼칠 것이다. 문제는 한국인의 성서이해가 이스라엘사람들 스스로의 자유로운 자기 이해조차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속박되고 경직되어 있다는 비극적 사실에 있다.    


헤르초그와 같은 학자들이 결코 이스라엘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성서의 이야기를 기준으로 하여 고고학적 발굴의 사태와 사실을 꿰어맞추는 일체의 연역적 독단을 경계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은 독립된, 도자적인 사실의 영역이며 그 자체로의 판단과 귀결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고고학적으로 귀결된 실재의 사실들은 바이블 스토리들 속에서 기술된 사태와는 전혀 별개의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는 논문 속에서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진술한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애굽에서 산 적이 없다. 그리고 사막에서 40년 동안 방황했다는 것도 근거가 없다. 그리고 무력적인 정벌 캠페인을 통하여 가나안땅을 복속시켜 그 땅을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도 사실무근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은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국이 성서에서 기술하고 있는바 찬란한 근동지역의 강력한 대국이 아니라 아주 미약한 보족의 한 왕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신관의 문제에 오면 나의 이러한 발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불편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인 야훼는 하나의 여성 애첩을 거느리고 있었으며(다시 말해서 유일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인이 있었다는 얘기), 초기 이스라엘의 종교가 유일신관을 채택하게 된 것은 오로지 남‧북의 왕조가 몰락해가는 쇠퇴기의 사건이며, 결코 시내산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역사를 실증적인 인간세의 시간의 지평 위에서 확고히 추적할 수 있는 카이로스인 동시에, 그 시점을 “카이로스”로 만들고 있는 민족적 체험의 긴박성은 바로 민족의 멸절의 가능성을 내포한 “바빌론유수”라는 정치사적 사건으로부터 온다. 바빌론유수는 유대민족의 가장 심오한 위기의식과 반성의식, 그리고 민족자존과 자립과 자성의 단결의식, 새로운 일체감을 불러일으킨 정신사적 원점이다.    


족장들의 이야기나 야훼와의 시내산 계약의 이야기는 이 정신사적 원점이 없이는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모세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며, 그 이야기가 역사적 근거를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그 이야기 자체가 비빌론유수라는 정신사적 원점이 없이는 그토록 발랄하고 생동감 있게 구성될 수가 없었다. 바이블 스토리의 모든 생생함은 근원적으로 암울한 위기의식, 침울한 멸절의식에서 온다.    


엘로힘문서가 북이스라엘왕국의 전승임에 반해, 야훼문서가 남유다왕국의 전승이라고 하는 설도 야훼유일신앙과 유다민족주의의 강렬한 결합이 남유다왕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입증되는 것이다. 야훼신앙체계가 구약언어의 주축을 형성하면서 여타 전승을 통섭해나간 것인데, 그 야훼를 주체로 삼는 언어들은 남유다왕국의 절박한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의 정통성의 보루, 유다지파의 상징이던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의 모든 공공건물과 가정집이 불탔다. 종교적 지도자들은 처형되고, 시드키야왕의 아들들은 왕이 보는 앞에서 도륙되었고, 시드키야왕은 눈깔이 뽑혔다.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 바빌론까지 끌려갔다. 텅 빈 예루살렘, 폐허의 예루살렘은 종말인 동시에 희망이며, 회한과 연민의 대상인 동시에 그리움의 대상이다.     


이스라엘 전 민족의 민족종교적 체험이 유다지파의 정통성으로 압축되면서 야훼와의 계약의 새로운 의미를 묻게 된다. 그 물음이 바로 토라며 율법이며 모세의 오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핵심이며 가장 오래된 역사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문헌은 BC 4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구약학 학자라면 누구든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사계의 정설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최종의 문헌적 사태를 말하는 것이며, 물론 그 기나긴 구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이제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절망감에 민족의 지도자들은 유수생활을 통하여 민족의 역사를 전하는 항간의 이야기들을 canon경전으로 만들어야만 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게 된다.     

바빌론유수 이전에는 대체적으로 구전자료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들 유대인 학자나 지도자들이 처한 환경은 기록자료가 풍부한 새로운 문명환경이었으며, 자기들이 알았던 세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다양한 신화와 담론과 역사이야기로 가득 찬 세계였다.    


창세기의 창세설화는 과연 유대인 고유의 것이었을까? 노아방주의 이야기가 과연 비가 별로 내리지 않는 유대평야의 이야기였을까? 아브라함 이래의 족장들의 이야기는 과연 순결한 이스라엘사람들의 전승일까? 자기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를 물어보는 손자에게 상상력이 풍부한 어느 할머니가 끝없이 구라를 뿜어대는 이야기가(story-telling) 아니었을까? 모세의 이야기는 과연 람세스 2세 통치 즈음에 애굽과 시내광야에서 일어난 일일까? 모세의 이야기가 없으면 과연 유일신 야훼와의 계약, 그리고 이스라엘민족 12지파의 Amphictyony(부족동맹)가 과연 성립할 수 있겠는가?    


성서이야기가 매우 다양한 스토리 라인이 있고 아기자기한 설화들의 장치가 있어 무한한 전승의 사실적 종합인 듯한 착각을 주지만 실제로는 모든 이야기의 디프 스트럭쳐(deep structure 심층구조)는 동일하다. 항상 이방에 처한 민족이, 그 민족의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땅, 그 이상향을 찾아가는 노스탈지아의 이야기! 그러나 그 에로스의 동력은 하나님이 기필코 그 약속을 지키리라는 믿음에서 온다. 그리고 그 믿음의 근원은 오직 하나의 하나님 야훼만을 섬기겠다는 약속, 야훼와 이스라엘민족 당사자간의 계약에 있다. 이 야훼는 질투라는 감정을 지니는 존재이므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전일자全一者일 수 없다. 그것은 계약의 당사자로서의 개체일 뿐이다!    


▶바빌론유수와 시온주의, 그리고 예루살렘

족장들도 이방에서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었고, 모세나 여호수아나 그 약속의 땅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죽었다. 다윗도 솔로몬도 유일신 야훼를 섬기는 성전을 봉헌하는 그 꿈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남‧북조의 분열의 역사, 그리고 또다시 바빌론이라는 이방에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야훼와의 언약을 완성시켜야 하는 사명감과 불안감에 끊임없이 배타적인 민족주체를 확립해야 한다. 이 예루살렘을 향한 동경, 이 시온주의Zionism는 오늘날 20세기~21세기의 이스라엘국가의 운명에도 변함없이 반영되어있다. 결국 구약이라고 하는 문학의 모든 패러다임의 저변에는 유랑의 근원적인 트라우마가 깔려있다.    


▶바울의 예수

바울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예수는 산 예수가 아니라 죽은 예수며, 인간 예수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이다. 그에게는 “부활하신 예수”야말로 “그리스도”이며 최후의 심판을 몰고 올 재림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이 “현세”는 철저히 부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예수는 당연히 현세적인 리얼한 예수가 아니라, 관념화된 예수이며 이념화된 예수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 바울의 새로운 교회운동이 베드로-야고보 중심의 예루살렘교회와 마찰을 끊임없이 야기했던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언뜻 보면 바울의 보편주의적 부활의 케리그마에 대하여 예루살렘교회가 율법주의적인 보수성을 견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기술은(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한들) 모두 바울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술이기 때문에 그러할 수도 있다. 오히려 예루살렘교회는 살아있는 인간 예수가 벌인 예수운동의 정통성을 고수하면서 바울의 관념성을 경계했다고도 볼 수 있다.


▶평가(서철원박사 교의신학 서론 참조)

도올의 신학은 자연이성에 의해 구성된 자연신학이다. 비중생자의 신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계시에 의한 신학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특별계시를 버리고 자연이성으로 신학하므로 결국은 중세의 자연신학과 같은 결과에 이른다. 특별계시인 성경에서 신학하지 않고 이성으로 하면 자연이성의 법칙을 따라 일반계시에 의해 신학하므로 결국 그리스도를 배제하여 신개신교주의가 된다.


신학은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출발하고 또 그 계시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계시가 신학의 출발점이고 근거이다. 또한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다른 모든 종교도 평가해야 한다. 종교의 보편현상에서 출발하고 그 보편종교 현상에 그리스도교를 포함시키면 안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 계시 곧 성경계시에 의해 모든 종교를 볼 때 그 종교들의 본질을 똑바로 보게 된다. 다른 종교들은 그리스도교와 동일 선상에 서는 것이 아니고, 참 종교의 변형이고 변조일 뿐이다. 자연인의 종교심이 일으킨 우상종교에 다름 아니다. 이방종교들을 우상종교로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성경계시에 의해서이다.


도올의 바울 해석은 그리스도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이성에 의존하여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에 이르러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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