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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Apr 04. 2018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원창화 역) 홍신문화사. 1988년.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키워드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그리고 사도마조히즘이다. 사디즘은 타인에게 고통 혹은 굴욕을 가하거나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성도착증(perversion)의 한 형태를 말한다. 마조히즘이란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이나 굴욕에서 만족을 느끼는 성도착증의 한 형태이다. 사도마조히즘은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의 합성어로, 가학적인 성향과 피학적인 성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적인 성향들이 자유를 억압하거나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되는 지를 보게 한다.


  저자는 근대사회에서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의미를 심도 있게 다룬다. 근대인에게 있어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고, 이어서 중세적 배경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에 대한 의미를 살핀다. 그리고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에서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파생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근대인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한 의미를 살핀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목적을 본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으며, 마침내 스스로 자연의 지배자가 되었다. 즉, 인간은 교회의 지배와 더불어 절대주의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최후의 싸움으로 여겨졌으며, 그 결말은 자유를 위한 궁극적인 승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들이 여러 세기에 걸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체계들이 나타났다.    


  자유를 찾는 대신 그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찾았고, 그밖에 수백만의 무관심한 사람들은 자유를 지키는 것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믿지 않았다.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외부로부터 기인하는 것보다는 인간 자신의 내부에 있음을 파악하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목적이다.    


  과거 역사에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다양한 상황들이 있어 왔다. 그중에서 저자는 파시즘에 의해 야기된 억압의 역사에 대해 그 의미를 깊이 살핀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힘으로부터 어떻게 참된 자유를 지키고 누려야 할 것인지를 조망하고 있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사도마조히즘적인 성향이 어떻게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는 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에게 자유가 무엇이고 또 그것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보게 한다. 책의 내용을 모두 다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근대 유럽의 역사와 사상의 흐름을 따라가야 했고,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흐름도 살펴야 했다.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본문을 정독하는 것이 바른 길이겠지만 대충 요약해 보는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겨져서 대충 정리해 본다.    


서문    


  서문에서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이 책이 근대인의 성격구조와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요인의 상호작용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의 일부로 썼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 책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근대인은 개인에게 안정감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그를 제약하는 전개인적 사회의 구속들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개인적 자아의 실현, 즉 개인의 지적 · 정서적 및 감각적인 능력의 표현이라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아직 획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과 합리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또한 근대인을 고립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를 불안에 싸인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고립은 참을 수 없는 것이므로, 근대인은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의존과 복종을 찾느냐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성에 기인된 적극적인 자유의 실현을 위하여 전진해 가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 책은 하나의 예측이라기보다 오히려 진단이지만(해결보다는 오히려 분석), 그 결과는 우리 행위의 진로에 대하여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여준다. 왜 자유를 내버리고 전체주의 쪽으로 도피하려는가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것을 타도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1장 자유 – 심리학적 문제인가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는 사람들을 구속해 온 정치적 · 경제적 및 정신적인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에 집중되고 있다. 자유를 위한 싸움은 억압받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지켜야 할 특권을 가진 자들에게 항거하여 새로운 자유를 얻으려고 했다. 한 계급이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동안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스스로 믿었다. 따라서 그들의 투쟁은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자유에 대한 이상과 동경에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억압에 항거해 온 계급은 자유를 위한 줄기찬 투쟁의 한 단계에서 승리하여 일단 새로운 특권을 지켜야 할 입장이 되면 그때에는 도리어 자유를 해치는 적들과 한편이 되었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으며, 마침내 스스로 자연의 지배자가 되었다. 즉, 인간은 교회의 지배와 더불어 절대주의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최후의 싸움으로 여겨졌으며, 그 결말은 자유를 위한 궁극적인 승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들이 여러 세기에 걸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체계들이 나타났다.


자유를 찾는 대신 그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찾았고, 그밖에 수백만의 무관심한 사람들은 자유를 지키는 것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믿지 않았다.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외부로부터 기인하는 것보다는 인간 자신의 내부에 있음을 파악하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목적이다.


  우리가 인간의 자유, 복종에 대한 갈망 및 권력에의 동경에 주목할 때 일어나는 몇 가지 뚜렷한 의문들이 있다. 인간의 경험으로서의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를 바라는 욕구는 인간 고유의 본성인가? 자유를 바라는 것은 그 인간이 속한 문화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동일한 경험인가, 아니면 특정한 사회의 개인주의 발달 정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인가? 자유란 단지 외적 압력이 없는 상태일 뿐인가, 아니면 무엇인가의 ‘실재’인가 –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를 위하여 싸우게 하는 사회적 및 경제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자유라는 것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부담이 되어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자유는 왜 많은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목표가 되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인가?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유에 대한 본유적인 욕망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반사회적이다. 따라서 사회는 인간을 교화시켜야 하며, 또한 생물학적인(그래서 좀처럼 근절할 수 없는) 충동에 대하여 직접적인 만족을 다소간은 허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대체로 사회는 인간의 근본적인 충동을 순화시켜 이를 교묘하게 억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회에 의해 자연적인 충동이 억압된 결과로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다. 억압된 충동은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노력으로 바뀌고, 그럼으로써 이는 문화의 인간적인 기반이 된다. 프로이트는 이들 억압으로부터 문화적인 행동이 발현하는 기이한 전환을 승화라고 명명했다.


  인간은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성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면 될수록, 또한 더욱 ‘개인적으로’ 되면 될수록 사랑이나 생산적인 작업의 자발성 안에서 외부 세계와 결합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유와 개인적 자아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외부 세계와의 유대에 의해 일종의 안전함을 구할 수 있을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2장 개성의 출현과 자유의 다의성    


  “자유란 근대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근대인은 왜, 그리고 어떻게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고찰하기 전에 하나의 개념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 개념은 약간 현실성이 결여된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근대사회에서의 자유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전제가 된다. 자유는 인간 존재 그 자체를 특징짓는 개념, 그리고 더 나아가 자유의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를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의식하는 정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개념 그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을 외부 세계와 연결시킨 탯줄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바로 그만큼의 자유가 없다. 그러나 이 관계는 그에게 안정감과 소속감, 어디인가에 뿌리는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개체화의 과정에 의해 한 개인이 완전하게 출현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관계를 나는 ‘일차적 관계’라 이름 짓고자 한다. 


  일단 개체화가 완전한 단계에 도달하여 개인이 이들 일차적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새로운 과제, 즉 그는 자신에게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고 자신을 외부 세계에 정착시키며, 전(前) 개인주의적 존재의 특징이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안전을 찾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유는 이러한 단계에 이르기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태아로부터 인간 존재로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이어 탯줄이 끊어지는 것은 어머니의 육체로부터 어린아이의 명백한 독립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은 단지 두 육체가 분리되었다는 소박한 의미에서 일 뿐, 기능적인 면에서 아이는 여전히 그의 어머니의 일부이다. 아이는 자기 자신의 행동을 통해 외부 세계를 경험하며, 개체화의 과정은 교육과정을 통해 더욱 촉진된다. 교육과정은 필연적으로 많은 욕망의 좌절과 금지를 수반하는데, 이는 어머니의 역할을 아이의 욕구와는 서로 충돌하는 목적을 가진 인간, 때로는 적대적이고 두려운 인간의 역할로 변화시킨다. 교육과정의 전부가 아니라 그 일부일 뿐인 이와 같은 적개심은 ‘나’와 ‘너’ 사이의 구별을 명백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점차 일차적인 혈연관계가 끊어짐에 따라서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마음은 더욱 왕성해 간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운명은 개체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변증법적인 성질을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어린아이가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더욱 강해지는 면이다. 또 다른 측면은 ‘고독의 증대’이다. 일차적 관계는 안전감과, 외부 세계와의 기본적인 조화를 제공해 준다. 어린아이는 외부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자기는 고독하다는 것,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실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인간은 개인이 되면서부터 홀로 위험하고 압도적인 모든 측면에서 외부 세계와 마주 서게 된다. 자신의 개체성을 포기하고 완전히 외부 세계에 몰입되었을 때 고독감과 무력감을 이겨내고자 하는 충동이 생긴다.  


  어린아이는 자아를 제한하는 관계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더욱 자유롭게 표현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는 그에게 안전함과 안도감을 주는 세계로부터도 보다 자유로워진다. 


  만일 분리와 개체화가 진행해 가는 모든 단계가 자아의 성장과 대응해 간다면 그 아이의 발달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개체화의 과정은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반면에 자아의 성장은 많은 개인적 및 사회적 이유들로 하여 방해받는다. 이러한 두 성향 사이의 지체가 참을 수 없는 고독감과 무력감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심리적 메커니즘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뒤에 ‘도피의 메커니즘’으로 설명된다.


  계통발생론적으로도 인간의 역사는 증가하는 개체화와 증가하는 자유의 과정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인간은 강제적인 본능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첫 순간에 전(前) 인간적인 단계에서 벗어난다. 한 동물의 발달단계가 낮으면 낮을수록 자연에 대한 적응 등 모든 행동은 더욱더 본능적이고 반사적인 행동 메커니즘에 의하여 지배된다. 


  인간 존재는, 본능에 의한 행동 고착의 결여가 일정 지점을 벗어날 때, 자연에 대한 적응이 그 강제성을 상실하게 될 때, 또한 행동양식이 유전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더 이상 고착되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다시 말해, ‘인간 존재와 자유는 그 발단부터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란 ‘……에 대한 자유(freedom to)’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즉 그 행위를 본능적으로 결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라는 소극적 의미이다.


  인간은 그의 존재를 시작하면서부터 서로 다른 행동 방향에 대한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동물의 경우에는 굶주림과 같은 하나의 자극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자극으로 인한 긴장을 해소하는, 다소 엄밀하게 정해진 행동 과정으로 끝을 맺는 일관된 연속적 반응이 있다. 인간의 경우 그러한 연쇄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인간은 서로 다른 행동 과정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정된 본능적 행동 대신 인간은 마음속으로 가능한 여러 행동 방식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순전히 수동적인 적응의 역할로부터 능동적인 역할로 바꾸어 간다. 인간은 도구를 발명하여 자연을 정복해 가면서 자연으로부터 더욱 멀어져 간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것이 자연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또한 그 자연을 초월해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분명해진다. 인간은 다양한 환상으로 부정하려 하지만, 결국 죽음이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임을 의식하게 된다.


  인간과 자유 사이의 근본적 관계에 대한 표현은 낙원으로부터의 인간 추방이라는 성서의 신화 속에 제시되어 있다. 그 신화는 인간 역사의 시작을 선택 행위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초의 자유로운 행위가 얼마나 죄 많은 것인가를, 그리고 그 결과로부터 생긴 고통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신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전쟁을 선언했다. 인간은 ‘개인’이 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이 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인간은 최초의 자유 행동을 범했다. 신화는 이 행위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강조한다. 자연을 초월하고, 자연과 다른 인간적 존재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벌거숭이 모습을 부끄러워한다. 인간은 혼자이고 자유롭지만 무력하고 두렵다. 그리하여 새로 얻어진 자유는 재앙처럼 보인다. 그는 낙원의 달콤한 속박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의 개체성을 실현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으로부터의 자유’는 적극적인 자유인 ‘……에 대한 자유’와는 같지 않다.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탈출은 대단히 오랜 기간에 걸친 과정이다. 그는 자기가 탈출해 나온 세계와 아직도 상당한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여전히 자연의 일부이다. 원시종교는 인간이 느끼는 자연과의 일체감을 증명하고 있다.

인류의 발달과정이 조화를 이룬 것이며, 명확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 발전의 양면(증가하는 힘과 증가하는 개체화)은 확실하게 균형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투쟁의 역사이다. 


  개체화의 모든 과정을 추진시켜 가는 경제적 · 사회적 · 정치적 조건이 개체성의 실현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지 않고, 그리고 인간들은 그들에게 일찍이 안전감을 부여해 주던 관계들을 잃는다면, 이러한 지연은 자유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부담으로 만든다. 그렇게 되면 자유는 회의 그 자체가 되며, 의미와 방향을 상실한 삶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자유로부터 벗어나, 비록 개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는다 할지라도 불안으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하는 인간과 외부 세계에 대한 복종으로 이들과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도피하고자 하는 강력한 성향이 생겨난다.


  중세 말기 이후의 유럽 및 미국의 역사는 개인 출현의 완전한 역사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과정이다. 중세기적 세계를 타파하여 가장 노골적인 속박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는 400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개인은 많은 점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발달했으며, 전에 없이 문화적 성취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으로부터의 자유’와 ‘……에 대한 자유’ 사이의 지연 또한 증가되었다. 어떤 관계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자유와 개체성을 적극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의 불균형은 마침내 유럽에서는 자유를 내버리고 새로운 관계로, 또는 완전한 무관심으로의 놀라운 도피로 나타났다.


  근대사회에서의 자유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근대문화가 발생한 종교개혁의 시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근대인의 형성기인 이 시기가 이후 어떤 시대보다 더 뚜렷하게 근대의 문화 전체에 작용해 온 자유의 다의적인 의미를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시대는 명백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과 유사하다. 종교개혁은 근대 민주주의에 표현된 바와 같이 인간의 자유와 자율이라는 관념의 한 뿌리이다.     


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제1절 중세적 배경과 르네상스    


  왜곡된 중세의 두 가지 견해 : 근대의 합리주의는 중세를 본질적인 암흑시대로 간주했다. 즉, 개인의 자유의 일반적인 결여, 극소수에 의한 수많은 대중 착취, 도시의 주민에 대해, 이국인은 물론 근교의 농민들마저 위험천만하고 이상한 이방인으로 보게 하는 편협성, 그리고 미신과 무지의 횡행 등이 중세기의 속성으로서 지적되어 온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로 보수적인 철학자들에 의해, 혹은 근대 자본주의의 진보적인 비평가들에 의해 중세는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들은 중세가 가진 속성으로서 연대감, 모든 인간적 요구에 대한 경제의 종속, 인간관계의 솔직성과 구체성, 가톨릭 교회의 초국가적 원리, 중세 인간의 특징을 나타내는 안정감 등을 지적했다. 

근대사회에 대비한 중세사회의 특징은 개인적 자유의 결여이다. 중세 초기의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자기의 맡은 바 역할에 얽매여 있었다. 개인적 생활은 물론, 경제적 및 사회적 생활에서도 한결같이 규칙과 의무에 속박되어 실제로 각 개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없었지만 중세 인간은 고독하거나 고립된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사회는 개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개인’이란 관념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와 더불어 인간의 성격은 중세 말기에 변화했다. 중세사회의 통일과 중앙집권은 점차 약화되어 갔고, 이에 비해 자본과 개인의 경제적 창출과 경쟁이 중요성을 더해 갔으며, 새로운 유산계급이 출현했다. 모든 사회계급 가운데서 ‘개인주의’가 현저하게 성장했는데, 이는 취미 · 유행 · 예술 · 철학 등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 시대는 근대적 개인주의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이 전(前) 개인적 존재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독립된 존재로서 명백하게 인식하게 된 과정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근원인 경제적 기구와 정신은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 문화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중 · 서부 유럽의 경제적 및 사회적 상황에서 생성된 루터와 칼뱅의 교의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종교개혁자들의 운동과 르네상스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운동은 그 사회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 개인적인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이 과연 도시 중산계급의 성격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프로테스탄티즘과 칼뱅주의는 새로운 자유의 감정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도피가 되었다. 


  15, 6세기의 사회적 및 경제적 변화가 개인에게 과연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까? 자유의 다의성이 발견된다. 개인은 경제적 및 정치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조직 속에서 활동적이며 독립적인 역할을 다함으로써 적극적인 자유를 획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일찍이 그에게 안전함과 소속감을 부여해 주기도 했던 속박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었던 폐쇄된 삶은 종말을 고했다. 세계는 막막하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것이 되었다. 인간은 폐쇄된 세계 속에서의 고정된 삶의 목적에 대한 의혹이 짙어지는 가운데 자본이나 시장과 같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해 위협당했다.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인 경쟁자였기 때문에 동료들과의 관계도 적의에 찬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자유롭게 되어- 홀로 고립되어 – 사방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일찍이 르네상스 시대의 자본가가 누렸던 것과 같은 부와 힘도 없이, 타인이나 외부 세계와의 일체감까지 상실한 인간은 그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력함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영원히 천국을 잃어버린 채 홀로 외부 세계와 직면하게 된 개인, 그는 막막하고 두려움에 찬 세계에 내버려진 이방인이었다.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결과로 동요 · 무력 · 회의 · 고독 · 불안을 안게 되었다. 따라서 개인이 바라는 바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이러한 여러 가지 감정은 마땅히 없애도록 노력해야 했다.    


제2절  종교개혁의 시대    


  바로 이러한 발전의 시기에 ‘루터주의’와 ‘칼뱅주의’가 출현하였다. 새로운 종교는 상층계급의 종교가 아니라, 도시의 중산계급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농민들의 종교였다. 새로운 종교는 이러한 집단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왜냐하면, 새로운 종교는 일찍이 그들에게 널리 침투되어 있던 무력감과 불안감은 물론, 자유와 독립이라는 새로운 감정마저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의 교의는 경제적 질서의 변화로 야기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감정들을 증가시켰으며, 동시에 개인으로 하여금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도 제공해 주었다.


  종교적 교의와 정치적 원리 등을 심리학적인 의미와 관련시켜 분석할 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문제를 구별해야 한다. 첫째로는 새로운 교의를 창안한 개인의 성격구조를 연구하여 그의 성격 중 어떤 점이 그의 사람의 독특한 방향을 낳게 했느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둘째로는 교의 창안자의 심리적인 동기가 아니라, 교의를 받아들이는 사회 집단의 심리적 동기를 연구하는 일이다. 교의와 사상의 영향력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성격구조에 의한 심리적인 요구에 과연 어느 정도 호소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상이란 어느 사회 집단의 강력한 심리적 요구들에 호응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역사상 강한 힘이 될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칼뱅주의의 교리가 가지는 심리학적 의의에 대한 분석을 해보는데, 적어도 개인의 사상과 이념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목적은 그 사상과 이념이 발생하는 심리적인 근원을 이해하는 데 있다. 그리고 우리는 루터와 칼뱅의 성격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회계급의 심리적인 상태를 고찰해 본다. 


  중세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의지의 자유, 그리고 인간 노력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또한 신과 인간의 유사성과 신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강조했다. 루터의 사상체계는 가톨릭적 전통과는 다른 두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는 여러 국가에서 루터의 교의가 채택될 경우 다른 어떤 면보다도 더욱 강조되어 왔다. 이 견해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인간에게 독립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루터가 교회로부터 그 권위를 빼앗아 이를 개인에게 부여했고, 그의 신앙과 구원의 개념은 주관적 및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으며, 개인이 스스로 획득할 수 없는 것을 타율적으로 부여하는 권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근대적 자유의 또 다른 측면은 개인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온 고독과 무력함인데, 이 역시 독립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티즘에 기원을 두고 있다. 


  루터는, 인간 본성에는 선천적인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의지는 악을 지향하게 됨으로써 어떠한 인간이라도 본성 그대로는 결코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곧, 인간은 사악하며 비도덕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타락과 선을 선택할 자유의 결여는 루터 사상체계의 근본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다. 루터는 신앙을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의심할 여지없는 주관적 체험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루터는 강렬한 회의의 과정을 거쳤다. 회의에서 확신에 이르는 변화는 모순되기는커녕 하나의 명확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고에 입각하여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견해를 의심해 보는 합리적인 회의는 아니었다. 그것은 외부 세계에 대해 불안과 증오의 태도를 취하는 인격이 가지는 고독과 무력함으로부터 나타나는 비합리적인 회의였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회의는 합리적인 해답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이런 일은 절대적인 확실성을 약속하는 공식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루터식의 해결방법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터는 죽을 때까지 회의 때문에 고민하고, 복종에 대하여 새로운 노력을 함으로써 회의를 극복해야 했다. 회의 의미 및 그것을 침묵시키려는 노력을 이해하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많은 합리적인 회의는 합리적인 해답을 통해서 비로소 해결되어 왔지만, 비합리적인 회의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인간이 소극적인 자유로부터 적극적인 자유로 발전하지 ㅇ낳는 한 결코 소멸될 수 없다. 회의 그 자체는 인간이 고독을 극복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인간적인 요구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터는 단지 자신의 하찮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철저하게 비하하여 개인적인 의지의 흔적을 모두 버리는 한편, 개인적인 힘을 부인하고 비난함으로써만 비로소 개인은 신의 은총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루터의 신에 대한 관계는 완전한 복종이었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신앙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만일 그대가 완전히 신에게 복종하여 자신의 하찮음을 인정하면, 전능하신 신께서는 기꺼이 그대를 사랑하여 구원할 것이고, 만일 결함과 의심뿐이 자아를 철저하게 제거해 버린다면, 그대는 비로소 그대 자신의 허무감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신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교회의 권위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구원을 받는 본질적인 조건으로써 인간에게 전적인 복종과 자아의 절멸을 요구한 전제군주적인 신의 권위에 복종시켰다.


  칼뱅 역시 인간은 마땅히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데, 이 자기부정이야말로 신의 권능에 의존하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가르쳤다. 칼뱅도 심한 고독감과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보수적인 중산계급의 사람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들의 감정은 개인의 하찮음과 무력함 또는 개인적인 노력의 공허함을 가르치는 칼뱅의 교의 속에 표현되었다. 대체로 칼뱅의 추종자들은 보수적인 중산계급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칼뱅은 예정설을 말했는데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즉, 예정설은 개인의 무력함과 무의미한 감정을 강조하고 있는데,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예정설만큼 강렬하게 표현한 교의는 달리 없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은 완전히 그의 힘 밖에서 이루어지며, 그 결정을 변경시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얼핏 보기에 예정설의 교의는 회의를 침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시키는 것같이 생각된다. 개인은 전보다 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천벌을 받도록 정해져 있는지 구원을 받도록 정해져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의혹에 사로잡히지는 않을까,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칼뱅은 그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아무런 구체적인 증거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선택된 인간이라는 확신을 실제로 품고 있었다. 그들은 이 확신을 루터에게서처럼 자기부정의 메커니즘에 의해 획득했다. 이러한 확신 때문에 예정설의 교의는 가장 안정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칼뱅의 예정설에는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할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예정설은 나치스의 이데올로기에 가장 생생한 형태로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불평등이 있다는 원리이다. 칼뱅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두 종류, 구원되는 인간과 영원한 천벌을 받도록 정해진 인간이 있다. 이러한 운명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어, 이 세상에서의 어떠한 행위로도 이를 변경시킬 수 없고, 또한 인간들 사이에 어떠한 연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칼뱅의 교의가 루터의 교의와 다른 또 하나의 대단히 중요한 점은 도덕적인 노력과 고결한 삶의 중요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도 ‘운명을 변경’ 시킬 수 없으나, 능히 노력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구원을 받은 사람에 속하는 증거이며, 인간으로서 반드시 획득해야 할 미덕은 겸손과 중용, 모든 사람이 자기의 정당한 몫을 가지는 의미에서의 정의, 그리고 인간을 신과 연결시키는 경건함이라고 한다. 칼뱅주의가 더 발전하면 고결한 삶과 끊임없는 노력의 의의를 강조하는 일도 중요성을 갖게 되며, 특히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세속적인 삶에서의 성공도 구원의 표시라는 생각이 중요성을 갖게 된다.


  칼뱅주의에서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노력에도 지치지 않으며, 또한 세속적인 일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행위에서도 성공하는 등은 그가 택함을 받은 인간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와 같은 강제적인 노력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그 활동으로 목적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어떤 사실이 과연 나타난 것인가 아닌가를 지시해 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잘 알려져 있는 강박적 신경증이 가지는 특징이다. 


  칼뱅주의에서는 이러한 노력의 의미는 종교적 교의의 일부분이었다. 본래 그것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노력에 관계되었지만, 그 후로는 직업상의 노력이나, 그 노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업상의 성패에 중점이 두어지게 되었다. 성공은 신의 은총을 받은 징조이며, 실패는 천벌을 받은 징조로 나타났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끊임없는 노력과 일에 대한 충동은 인간의 무력함에 관한 근본적인 확신과 모순되기는커녕 오히려 심리적으로 당연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노력과 작업은 완전히 비합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는 인간의 운명을 변경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이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운명은 신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적인 노력은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에 안심을 부여하기 위한 방편이다. 


  노력과 작업을 목적 그 자체로 보는 이와 같은 새로운 태도는 중세 말기 이래로 인간에게 발생한 가장 중요한 심리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삶에서는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 이상 일하려는 충동은 없었다. 내적인 충동은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여 그날그날의 업무에 종사하게 하는 데 외적인 강제보다 더 효력이 있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점은 사람들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보다는 내적인 충동에 의해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봉건사회라는 중세적 체제의 붕괴는 사회의 모든 계급에 걸쳐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개인은 홀로 떨어져 고립되었다. 곧, 개인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자유는 이중적이었다. 인간은 그때까지 누렸던 안정성과 더불어 의심할 바 없는 소속감을 상실했으며, 경제적 및 정신적으로 개인의 안전함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던 세계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결과 개인은 고독과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또한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생각하는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으며, 다른 사람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개인의 활동과 의지의 힘을 강조하는 일은 중세 말기 가톨릭의 교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시대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권위에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 지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의 적극적인 의미, 인간의 자기 운명에 대한 결정에의 참여, 그리고 인간의 힘과 존엄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다.


  한편, 도시의 빈민인 하층계급, 특히 농민들은 자유를 위한 새로운 요구에 자극되어, 증진되어 가는 경제적 및 인간적인 압박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열렬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잃어버릴 것은 거의 없었고, 얻어야 할 것은 많았다. 그들의 교의의 세밀한 구별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고 오히려 성서의 근본적인 원칙, 곧 우애와 정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희망은 수많은 정치적 반항과 종교운동 속에 적극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발생 당시 전형적이었던 타협하지 않는 정신으로서 특징지어졌다.


  16세기 초만 하더라도 중산계급에 속하는 개인은 아직 새로운 자유로부터 많은 권력과 안정을 얻을 수는 없었다. 자유는 힘과 자신감보다는 오히려 고독과 개인의 무의미성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중산계급의 개인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를 포함한 유산계급이 누리고 있는 사치와 권력에 대하여 더욱 맹렬한 분노를 느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바로 이러한 무의미성과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신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인간의 신뢰감을 파괴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불신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하게 했다. 


  새로운 종교 원리는 중산계급의 구성원이 느끼고 있던 것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합리화시켜 체계화함으로써 확대시키고 강화했다. 새로운 종교는 그 이상의 일, 즉 개인에게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인간 본성의 사악함을 철저하게 시인함으로써 전 생애를 속죄하는 과정으로 삼아, 극도의 자기비하와 끊임없는 노력으로써 비로소 회의 불안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위협당하고 추방되어 고립된 인간이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의 방향을 정함으로써 그것과 관계를 맺으려 한 인간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주요한 교의가 내포하는 심리학적 의미는 이렇다. 새로운 종교적 원리는 중세기적 사회조직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대두로 말미암아 야기된 심리적인 여러 요구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자유의 문제였다. 중세사회의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에게 새로운 독립의 감정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고립감을 느끼게 하여 개인으로 하여금 회의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했고, 마침내는 새로운 형태의 복종 및 강제적이고 비합리적인 활동을 감행케 했다.    


4장 근대인을 위한 자유의 양면성    


  이 장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진보된 발달은 종교개혁의 시대에 시작되었던 변화와 동일한 방향에서 인간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의에 의해 사람들은 근대적 산업체제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를 하였다. 근대사회의 구조는 동시에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인간은 더욱 독립적이며 자율적이고 비판적이 되었다는 사실과, 더욱 고립되어 외롭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사에서 수행되었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는 ‘낡은’ 형태의 권위와 속박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주의가 집중되었기 때문에, 이들 전통적인 속박이 제거되면 될수록 당연하게도 인간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된다고 느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 낡은 적들로부터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성질을 가진 새로운 적들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새로운 적들이란 본질적으로 외적인 속박이 아니라 성격의 자유를 완전하게 실현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내적인 요소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궁극적인 자유의 승리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자유는 사람들이 자기 양심에 따라서 신앙을 갖는 것을 불허했던 교회와 국가의 권력에 대한 승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인은 자연과학적 방법으로는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믿는 내적인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데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서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지시하는 외적 권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여론과 ‘상식’ 같은 익명의 권위가 가지는 역할을 경시하고 있다. 우리는 ‘외부에 있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데 열중하여 ‘내부에 있는’ 속박과 강제, 그리고 두려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은 자유가 전통적인 적에게서 쟁취한 승리의 의미를 훼손시킨다. 전통적인 자유를 보존하고 이를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자아를 실현하고, 실현된 자아의 삶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자유를 획득해야만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가운데 시도했던 것을 자본주의는 정신적 · 사회적 및 정치적으로 계속해 갔다. 경제적 자유가 그러한 발전의 기반이 되었으며, 중산계급은 그 투사였다. 


  각 개인은 눈앞에 하나의 목표를 정하여 그것을 향해 진력할 수 있었으며, 또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때때로 주어졌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의존하여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며, 마음에 위안을 주는 미신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점차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으며, 전에는 전혀 듣지도 꿈꾸지도 못했던 수준에서 자연의 힘을 지배했다. 사람은 평등하게 되었다. 일찍이 인류의 통일을 방해하는 자연적 경계였던 계급과 종교의 차이는 소멸되고, 인간은 서로를 인간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세계는 점차 미혹하는 요소들로부터 벗어났으며,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환상을 거의 갖지 않고 바라보게 되었다. 인간의 정치적 자유도 증가되어 갔다.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던 중산계급은 그 경제적 힘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여 얻은 정치적 권력으로 경제적 진보를 위한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는 단지 인간을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인 자유를 증대시켜 능동적이며 비판적인, 그리고 책임질 수 있는 자아를 성장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발전해 가는 자유의 과정에 미친 영향이었다면, 그와 동시에 그것은 개인을 더한층 고립시킴으로써 개인들에게 하찮음과 무력감을 갖게 했다. 자본주의는 개인에 대한 긍정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직접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 연결되어 있는 자기부정과 금욕주의도 초래했다. 


  중세적 조직에서 자본은 인간의 하인이었지만, 근대적 조직에서 자본은 인간의 주인이 되었다. 경제적 활동은 필요한 것이며, 부(富)조차도 신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외적 활동은 그것이 삶의 목적을 촉진시키는 한도에서만 의미의 존엄성을 지닌다.


  인간은 거대한 경제적 기계의 한 톱니바퀴가 되었다. 많은 자본을 가진 인간은 중요한 톱니바퀴이고, 자본을 갖지 않은 인간이라면 무의미한 톱니바퀴일 뿐이다. 그러나 그 톱니바퀴는 항상 자기 외부에 있는 목적에 봉사한다. 이렇게 인간 외적인 목적에 쉽사리 자기를 복종시키고자 하는 이러한 경향은 실제로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루터나 칼뱅의 정신에서는 경제적 활동에서 이 같은 우월성을 인정하는 일만큼 거리가 먼 일은 또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신학적인 교의에서 인간의 정신적인 지주인 존엄성과 자존심의 감정을 파괴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활동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목적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러한 경향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자본의 축적을 위해 일한다는 원칙은 객관적으로는 인류의 진보에 대해 큰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주관적으로는 인간이 개인의 외부에 있는 목적을 위해 일하도록 하고, 인간이 만든 기계의 하인이 되도록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개인의 하찮음과 무력함의 감정을 지니게 했다. 고용주에 의한 직접적이거나 개인적인 의존 외에, 노동자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본가의 특징이 된 금욕주의 정신과 개인의 외부에 있는 목적에 복종하는 정신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인간을 초개인적인 경제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으며,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이미 심리적으로 준비되었던 금욕주의 정신과 개인의 하찮음에 대한 정신을 증대시켰다. 이것은 근대인의 희생적이거나 금욕주의적인 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와 개인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되는 사실과는 모순된다. 객관적으로 인간은 그의 것이 아닌 목적에 봉사하는 하인이 되었으면서도 주관적으로는 자기 이익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과 근대적인 자기중심주의의 신조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프로테스탄티즘은 비이기적인 마음, 이타심을 강조하면서 근대의 이기주의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린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 행동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며, 개인적 이익의 추구는 어떠한 도덕적 고려보다 강하여, 인간은 자기 아버지의 죽음보다 오히려 재산을 잃는 것을 더 참을 수 없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모순은 비이기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이기주의를 감추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이라 할 수 있겠지만, 충분한 해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루터나 칼뱅, 또 칸트나 프로이트 사상의 근저에 있는 가정은, 이기심과 자기애(自己愛)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미덕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죄이며, 더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기에 대한 사랑은 서로 배타적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못된 생각과 만나게 된다. 사랑은 원래 특정한 대상에 의해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잠재하는 어렴풋한 것으로 ‘대상’은 단지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데 불과하다. 증오는 파괴를 구하는 강렬한 욕망이며, 사랑은 어떤 ‘대상’을 긍정하려는 정열적인 욕구이다. 즉, 사랑은 ‘정서’가 아니다. 대상의 행복 · 성장 · 자유를 지향하는 적극적인 추구이며 내적인 관련성이다.


  단 한 사람에 대해서만 경험되는 사랑은,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새도마조히즘적인 집착임이 드러난다. 사랑에 포함된 근본적인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성질이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존재로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한다.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은, 종종 생각되는 것처럼 특정 인간에 대한 사랑 ‘다음에’ 오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또한 특정 ‘대상’과의 경험이 확대된 것도 아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은 물론 발생적으로 구체적인 개인과의 접촉에 의해 획득되지만, 그것은 특정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전체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원칙적으로는 나 자신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유도된다. 이기주의와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반대인 것이다. 이기주의는 탐욕의 일종이다. 이기주의는 바로 이 자기애의 결여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근대인이 자기의 이익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사실은, 칼뱅이 인간 존재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이어야 한다고 한 것처럼, 그의 삶을 자기의 것이 아닌 목적에 바치고 있는 모순에 직면했다. 우리는 이기주의가 참된 자아에 대한 긍정과 사랑, 즉 모든 잠재력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긍정과 사랑의 결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근대인이 행동하는 ‘자아’는 사회적인 자아, 본질적으로 개인에 의해 수행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역할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사회에서의 인간의 객관적인 사회적 기능을 단순히 주관적으로 위장한 것에 불과한 자아이다. 근대적 이기주의는 참된 자아의 좌절에 근거한 탐욕이며, 그 대상은 사회적 자아이다. 근대인은 자아의 극단적인 주장을 특징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의 자아는 약화되어 전체적인 성격의 다른 모든 부분을 제외한 전체적 자아의 한 부분인 지성과 의지력으로 축소되었다.


  근대인의 고립감과 무력감은 그의 모든 인간적인 관계가 지니고 있는 성격에 의해 더욱 확장된다. 자본의 소유자는 다른 인간을 마치 기계를 ‘고용’하듯 고용한다. 고용주나 고용인 모두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을 구하여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양자가 모두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면서, 서로 상대방의 도구가 되는 관계이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경제적인 관계뿐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마저 소외된 성질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소외된 관계는 인간적인 존재 서로의 관계가 아니라 물건과의 관계이다. 이러한 수단화와 소외된 정신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황폐한 예는 개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이다. 인간은 단순히 상품을 팔 뿐 아니라 자신을 팔며, 또한 스스로 상품처럼 느끼고 있다. 육체노동자는 육체의 힘을 팔고, 상인과 의사와 사무원은 그들의 ‘인격’을 판다. 자신, 곧 ‘자아에 대한 자각’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그에 대한 생각을 가리키는 데 불과하다. 한 인간이 실제적인 일을 잘 해나가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는지, 아니면 열등감의 심연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지 하는 것도 다 인기와 관련되어 있다. 자아를 지탱하는 다른 요소들은 명성과 권력이었다. 재산이나 사회적 명성을 거의 갖지 못한 인간에게는 가족이 개인적인 특권의 원천이었다.


  약화된 자아를 지탱하는 요소들은 단순히 불안과 불안정감에 대한 보상을 도왔을 뿐이다. 그 요소들은 불안과 불안정감을 근절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은폐함으로써 개인이 의식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의식적인 안정감은 표면적인 것으로, 지탱해 주는 요소들이 있을 때만 그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실상의 경제적 · 정치적 자유, 개인적 창의에 대한 기회나 증대하는 합리적인 계몽과 같은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시대나 사회적 집단에서는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인 자아의 힘과 존엄성이 지배적 요소였다. 근대의 철학적 사고에서도 종교개혁의 신학적 교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의 두 측면이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나 헤겔에게서 개인의 자율과 자유는 그들 사상체계의 중심적인 공리이지만, 그들은 개인을 전능한 국가의 목적에 종속시키고 있다.


  개인적 자아를 약화시키는 성향의 요소들은 그 비중이 커지고, 개인을 강하게 하는 성향의 요소들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개인의 무력감과 고립감이 증대되고, 모든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강화되는 한편, 개인의 경제적 성취에 대한 가능성은 축소되었다. 개인은 거대한 힘으로부터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끼며, 그 사정은 여러 면에서 15, 6세기의 상황과 유사하다.


  거대한 경제적 기계의 일부인 그들은 고도로 특수화된 일에 종사하며, 같은 위치에 있는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과 격렬한 경쟁을 해야 하고, 만일 낙오되면 용서 없이 추방당한다. 대기업의 광대함과 그 우월한 힘에서 비롯되는 심리적인 영향은 노동자에게도 미친다. 주인은 하나의 추상적 상(像)으로, 그는 전혀 주인을 보지 못한다. ‘경영’이란 그가 간접적으로밖에 참여할 수 없는 익명의 힘이며, 거기에 대해 개인으로서의 그는 거의 무의미한 존재이다. 대기업에서 노동자는 자기에게 배당된 일에 관계된 작은 부분밖에 볼 수 없다. 오늘날에 대인의 하찮음은 단지 상인과 고용인, 육체노동자의 역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물건을 사는 고객의 역할에도 영향을 미친다. 상품의 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아편이나 지독한 최면술처럼 고객의 비판력을 질식시키고 말살해 버린다. 그러므로 인간의 하찮음과 무력감의 정도를 증대시킨다. 사실상 비판적 사고력을 둔화시키는 이런 방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공공연한 공격보다 훨씬 더 위험하며, 발매 금지당하는 외설문학보다 더 비도덕적이다. 오늘날 유권자들은 거대한 산업 조직과 마찬가지로 멀지만 강제성을 띤 거대 정당과 직면해 있다. 고객에 대한 광고의 효과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선전의 방법도 개별 유권자들의 하찮음을 증대시키는 성향이 있다.


  개인의 무력감을 더욱 증대시키는 다른 요소들로서 전쟁의 위험과 함께 구조적 실업은 사회적 불안감을 증대시켰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행진하는 병사와 끝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벨트 곁에서 일하는 노동자처럼 보조를 맞추는 일뿐이다. 그는 행동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에 대한 독립감과 중요성에 대한 감각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키마우스 영화에서처럼 강력하고 밉살스러운 적에게 위협받고 있는 작은 것은 분명 관객 자신이고, 그가 느끼는 방식이며, 그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행복한 결말이 없다면 언제까지 그 매력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키에르케고르는 회의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독과 하찮음의 감정에 압도된 무력한 개인을 그린다. 니체는 뒷날 나치즘에서 노출된 것과 같은 허무주의를 예견하고, 그가 현실에서 본 무의미하고, 목표도 지니지 않은 개인의 부정으로서 ‘초인’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하찮음이라는 주제는 카프카의 작품에서 가장 정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는 작품 [성(城)]에서, 신비한 성의 주민들과 사귀고자 하는 인간을 그린다. 그 성의 주민들은 그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해 주고, 세상에서의 그의 위치를 가르쳐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의 삶은 성의 주민들과 사귀고자 하는 광기 어린 노력으로 점철되지만, 그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 채 헛되고 안타까운 감정에 사로잡혀 외톨이로 남겨진다.


  이들 작가들이 그린 것과 같은, 또는 소위 수많은 신경증 환자가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개인의 고립감과 무력감을 보통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매일같이 판에 박은 듯한 활동, 개인적 또는 사회적 관계에서 발견하는 확신과 칭찬, 사업에서의 성공, 모든 종류의 기분전환, ‘즐기고’ ‘사귀고’ ‘놀러다니는’ 등에 의해 은폐된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어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립감과 두려움, 당황스러움은 여전히 남는다.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을 오래도록은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소극적인 자유에서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갈 수 없는 한,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도피의 중요한 사회적 통로는 파시스트 국가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지도자에의 예속이며, 민주주의 국가에 널리 보급되고 있는 강제적인 순응이다.


  고독과 무력감에서 도피하려고 할 때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권위에 예속하든가, 이미 이루어진 행동 양식에 강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개인적 자아를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을 다음 장에서 제시하려고 한다.    


제5장 도피의 메커니즘    


  도피의 메커니즘은 고립된 인간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된다. 개인에게 안정감을 부여해 주던 일차적 관계가 끊어지고, 완전히 분리된 실체로서의 외부 세계와 직면하면, 무력감과 고립감의 참을 수 없는 상태를 극복해야 하는 두 개의 과정이 나타난다. 그 하나를 택함으로써 그는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갈 수 있다.
 

제1절 권위주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최초의 메커니즘에는 인간이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포기하고, 개인적 자아에 결여된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그 자신을 융합시켜 가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상실한 일차적 관계 대신 새로운 ‘이차적’ 관계를 추구하려 하는 성향이다. 이 메커니즘은 복종과 지배를 둘러싼 노력 또는 오히려 정상적이거나 신경증적인 인간들 속에 다양한 정도로 존재하는 마조히즘 및 사디즘이라고 해야 할 노력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조히즘적인 노력으로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양상을 열등감, 무력감, 개인의 하찮음에 대한 감정 등이다. 이런 감정에 사로잡힌 인간을 분석해 보면, 그들은 의식적으로는 이 감정에 불만을 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힘에 의해 스스로를 무력하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내부로 향하는 이러한 성향은 보다 공개적이지 않고, 동시에 덜 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마조히즘적인 성향은 단순히 병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성향이 합리화되는 경우는 더욱 많다. 마조히즘적인 의존은 사랑이라든가 충성, 또는 실제적인 결점을 적절하게 표현한 열등감, 그리고 전적으로 바꿀 수 없는 환경의 탓이라고나 할 수 있는 인간의 고민 같은 것으로 합리화된다.


  사디즘적인 성향은 명백한 이유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훨씬 더 폐해가 적은 마조히즘적 성향보다 잘 의식되지 않으며, 대체로 합리화되는 경우가 많다. 흔히 그것은 타인에 대한 지나친 선의와 배려의 결과로 은폐된다. 마조히즘적 인간의 의존은 뚜렷해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지만, 사디즘적인 인간의 의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기 쉽다. 강하고 지배적인 사디즘적인 인간의 사디즘 대상은 사디즘이 강하고 지배적인 만큼 약하고 복종적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조건에서 강자인 그가 지배하는 약자에 의존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관찰자들에게 사디즘은 마조히즘에 비해 그리 문제성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남을 해치고 지배하려는 일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극히 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뇌와 약함이 인간 노력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조히즘적 도착’이다. 극히 의식적인 방법을 통해 괴로워하고, 그 괴로움을 즐기려는 인간이 있다. 마조히즘적 성향이 얼마나 성적 도착과 유사한지, 그리고 이 두 유형의 마조히즘이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인식이 차츰 확산되어 갔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만일 인간이 파괴적 본능을 성과 융합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든가 타인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마조히즘적 노력과 사디즘적 노력은 둘 다 견딜 수 없는 고립감과 무력감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일,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일, 다시 말해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마조히즘적인 노력이다. 마조히즘적인 노력은 그 단점, 갈등, 의혹, 또는 견딜 수 없는 고독감을 갖는 자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로 이루어지고 있다. 마조히즘의 비합리성은 다른 모든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속할 수 없는 감정적인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궁극적으로는 비생산적이라는 데 있다.


  마조히즘적 도착은 정신적인 마조히즘과 마찬가지로 결코 진실한 목적이 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나 그것은 자기를 잊어버리려 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그와 연관된 모든 힘과 자부심을 포기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완전성을 잃고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대신, 그 자신이 몰입한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안전과 자부심을 획득한다. 또 그는 회의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에 저항할 수 있는 안전성도 획득한다.

이렇게 하여 마조히즘적인 인간은 외부적 권위, 내면화된 양심, 심리적 강제 중에서 그 어느 것을 주인으로 정하고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결정을 내리는 일로부터 해방된다. 곧, 자기 운명의 최후적인 책임을 지는 일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어떤 결정을 해야 할 것인가 망설일 필요 없이 그 회의에서 해방되며, 또한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회의에서도 해방된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는 그가 굴복함으로써 연대를 이룬 강력한 권력과의 관계에 의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의 삶의 의미와 자아의 완전성은 스스로 굴복한 보다 큰 권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디즘적인 충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타인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하여, 그를 자신의 의지에 대해 무력한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에게 군림하는 절대적인 지배자가, 그의 신이 되어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이다. 그의 자아를 소멸케 하여, 그를 노예로 삼은 것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 가운데 근본적인 목적은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지배하는 힘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어,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자에게 고통을 참고 견디게 하는 일보다 더 커다란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타인(또는 다른 생물)을 완전히 지배하는 쾌락, 이것이 사디즘적인 충동의 본질이다.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이 두 성향은 심리학적으로 하나의 근본적인 욕망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곧, 참을 수 없는 고독에 대한 개인의 절망적인 대처이며, 자기 자신의 약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 바로 그것이다.


  사디즘적 인간은 마조히즘적 인간에게 그 대상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이 필요하다. 마조히즘의 경우와는 달리 타인에게 말살당함으로써 안정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말살함으로써 안정감을 얻는다. 어느 경우에나 개인적 자아의 전체성은 상실된다. 사디즘적 또는 마조히즘적인 특성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전인격이 그런 특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들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특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새도마조히즘적 추구와 권위주의적 성격은 무력감이 보다 극단적인 형태를 위하는 경우이며, 또한 숭배하거나 지배하는 대상과 공서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무력감에서 벗어나려 하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제2절 파괴성    


  새도마조히즘적인 노력과 파괴성은 서로 깊이 얽혀 있기는 하지만 구별되어야 한다. 파괴성이 새도마조히즘적인 노력과 다른 점은,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대상과 함께하는 공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제거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파괴성 역시 공서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을 수 없는 개인의 무력감과 고립감에 기인한다.


  파괴성은 개인이 자기와 비교해야 할 모든 대상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참을 수 없는 자아의 무력감으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파괴적인 성향이 인간의 행동에서 얼마나 놀라운 역할을 하는가를 살펴보면, 고독과 무력함이 파괴성의 다른 두 원천인 불안과 삶의 장애에 달려 있다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로이트는 성적 충동과 자기보존의 추구가 인간 행위의 기본적인 두 가지 동기라고 생각했던 초기에는 파괴적인 충동의 비중과 중요성을 경시했다는 점을 확신하고, 인간 내면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성향이 있다고 가정하기에 이르렀다. 즉, 삶을 지향하며 다소나마 성의 리비도와 일치되는 충동과, 생명의 파괴 그 자체를 지향하는 죽음의 본능이 그것이다.


  개인에게서 볼 수 있는 파괴성의 정도는 삶의 신장(伸張)이 억압되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 욕구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이 아니라, 삶 전체의 장애, 즉 인간의 감각적이고 감정적이며 지적인 모든 능력의 자발적인 성장과 표현의 장애를 뜻한다. 삶은 자신의 내적인 동력을 가지고 있다. 즉, 삶은 성장과 표현과 생존을 추구한다. 만일 이 성향이 방해되면 삶을 추구하는 에너지는 분해과정을 거쳐 파괴를 구하는 에너지로 변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삶을 구하는 충동과 파괴를 구하는 충동은 독립된 요인이 아니라 서로 얽힌 상태로 의존해 있다. 삶을 구하는 충동이 방해받을 때 파괴를 추구하는 충동은 강해지고, 삶이 실현될수록 파괴적 충동은 약해진다. ‘파괴성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삶의 폭발이다.’ 삶을 억압하는 이 개인적 · 사회적 조건은 파괴에 대한 격정을 낳게 되며, 이 격정은 저수지와도 같은 것을 이루어 특수한 적대적 성향(타인에 대해서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건)을 조장한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하류 중산계급의 파괴성이 나치즘을 발흥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나치즘은 이러한 파괴적인 추구에 호소함으로써 그 힘을 적에 대한 싸움에 이용했다. 
 

제3절 자동 순응성
 

  도피에 대한 또 다른 메커니즘에는,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물러나 그 위협을 소멸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어떤 정신병적인 상태에서 볼 수 있는 징후로, 자기를 심리적으로 확대하여 외부 세계를 상대적으로 축소하는 방법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됨을 그치고 변화하는 것이다. 그는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기대하는 그런 상태로 변화된다. 그와 함께 ‘나’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지불한 대가는 혹독하게 비싼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사고나 감정에 있어서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진실한 감정과, 자기로서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자기의 것이 아닌 거짓 감정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이나 감정에 진실로 통하는 것은 또한 의지에 대해서도 진실로 통한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할 때, 외적인 힘에 의해 확실하게 강제되지 않는 한, 그들의 결정은 그들 자신의 것이며, 무엇인가를 바랄 때 그렇게 바라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환상의 하나이다.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암시되는 어떤 것이다. 결정을 내린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 인간의 결정 행위는 인간이 두려운 고립감이나 생명, 자유, 안락함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내몰렸을 때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인간의 결정이라는 현상을 관찰하면, 그것은 습관이나 의무 또는 단순한 압력에 따르는 데 불과한데도 그것을 ‘스스로의’ 결정이라고 인식하는 잘못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저질러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아의 상실과 함께 나타나는 거짓 자아의 대치는 개인을 심한 불안상태로 내몬다. 본질적으로는 타인의 기대에 대한 반영이며, 어느 정도 자신의 완전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회의가 따라다닌다.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자동기계화는 인간의 무력함과 불안감을 확대시켰다. 그 때문에 인간은 안정을 부여해 주거나 회의에서 그를 구해 준다고 믿는 새로운 권위에 쉽사리 복종하게 된다.    


6장 나치즘의 심리    


  나치즘에 대한 과학적 논의와 일반적인 논의에서 두 가지 대립되는 견해가 있다. 곧, 심리학은 파시즘과 같은 경제적 · 정치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견해와, 파시즘은 전적으로 심리적인 문제라는 견해이다.


  첫째의 견해는 나치즘을 오로지 경제적 사회운동의 결과로 보거나, 또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둘째의 견해는 나치즘은 심리학에 의해서만, 또는 나아가 정신병리학에 의해서만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미치광이 또는 ‘신경증 환자’로 간주되며, 그의 추종자들 역시 미치광이로 정신적인 균형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치즘은 심리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심리적 요인 그 자체는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것임이 이해되어야 하고, 경제적 · 정치적인 문제인 나치즘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게 된 배경은 심리적 기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치즘의 성공에서 그 심리적 기반을 생각할 때, 맨 먼저 다음의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부 사람들은 어떤 강력한 저항도 하지 않고, 또한 나치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실천에 대한 찬미자가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치 정권에 굴복했다. 다른 일부 사람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깊이 끌려 그 주장자들을 열광적으로 추종했다. 나치 정권에 대해 그렇게 쉽게 힘없이 복종한 것은 심리적으로는 주로 내적인 피로와 체념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상태는 근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개인의 특징이며, 그러한 현상은 민주적인 여러 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쥐고부터는 하나의 유인(誘因)이 더욱 힘을 얻어 대다수가 나치 정부에 대해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히틀러 정부는 ‘독일’과 같은 것이 되었다. 일단 히틀러가 권력을 쥔 이상, 그에게 도전하는 것은 독일인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몰아내는 행위를 뜻했다. 어떤 정당이라도 일단 국가 권력을 장악하면, 고립감에 대한 두려움과 도덕적 원리의 상대적인 약화가 대다수 민중의 충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군주정치의 권위는 확고부동한 것으로, 하류 중산계급의 성원은 그 권위에 의지하여 일체가 됨으로써 안정감과 자존감을 획득했다. 또한 종교나 전통적이고 도덕적인 권위가 아직도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가정은 아직 동요되지 않아 적대적인 세계에 대한 안전한 피난처 구실을 했다. 개인은 안정된 사회적 · 문화적 조직에 속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현존하는 권위에 대한 복종과 충성은 그의 마조히즘적 충동을 만족스럽게 해결해 주었다. 


  군주제와 국가는,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중산계급의 존재를 지탱하는 단단한 암석과 같은 것으로, 패전과 군주제의 붕괴로 야기된 몰락과 패배는 이들 생활 기반의 붕괴를 초래했다. 전후 급속히 쇠퇴한 것은 하류 중산계급의 경제적 지위만이 아니었다. 그 사회적 위신 또한 그러했다. 전쟁 전만 하더라도 중산계급 사람들은 자기네를 노동자보다도 우월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혁명 후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지위는 현저하게 향상되었으며, 그 결과 하류 중산계급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내려다볼 사람도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작은 상점 주인으로서나 그와 비슷한 삶에서 언제나 가장 귀중한 재산의 하나이던 특권마저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요인에 더해 그들에게 안정감을 확보해 주는 마지막 요새였던 가족 또한 어떻게 손써볼 수도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군주제 또는 국가 권위와 같은 낡은 사회적 상징의 쇠퇴는 개인적인 권위인 부모의 역할에도 영향을 미쳤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로부터 부모 세대를 존경하도록 배웠는데, 부모의 초라해진 권위가 공공연하게 드러나면서 부모 또한 스스로의 위신과 권위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의 증대는 국가사회주의의 중요한 원천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구 중산계급의 성원들은 경제적 · 사회적 운명을 인식하는 대신 자기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국가와 연결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국가의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은 현실적인 불만, 곧 사회적인 불만의 상징이 되었다. 1918년 전승자들의 독일에 대한 대우가 나치즘 발흥의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자주 언급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구 중산계급의 무력감, 불안, 사회 전체로부터의 고립, 그로 인한 파괴성만이 나치즘의 유일한 심리적 원천은 아니었다. 농민들은 자기들이 빚지고 있던 도시의 채권자들에게 분노를 느꼈으며, 또한 노동자들은 1918년 최초의 승리 이후 전략적인 주도권을 거의 상실한 지도자 밑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정치적 후퇴로 하여 깊은 실망과 낙담에 빠져 있었다. 민중의 대부분은 독점자본주의의 전형으로 말한 바 있는 개인의 하찮음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들은 나치즘의 발전에 불가결한 인간적 기초를 이루어주었을 뿐, 나치즘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나치즘의 심리적 기반이 구 중산계급이었다는 진술과, 나치즘은 독일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는 진술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원칙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발흥기에서 도시 중산계급의 역할에 대한 문제에 주어진 답과 같다. 대전 후 독점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받은 것은 중산계급, 특히 하류 중산계급이었다. 그 결과 중산계급의 불안,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되는 증오가 축적되었고, 마침내 중산계급은 두려움에 빠져 무력한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와 더불어 무언가 강한 힘에 예속되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 찼다. 이 감정은 서로 전혀 다른 계급에 의해 계급 각각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정체에 이용되었다. 히틀러가 그 유효한 도구가 된 것은, 그가 분노와 증오에 찬 소시민의 특징과 독일의 산업주의자들과 융커의 이익에 언제든 봉사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자의 특징을 감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구 중산계급의 구세주로 가장하여 백화점의 파괴와 은행자본의 지배 타파 등을 약속했다. 나치즘은 진정으로 정치적 및 경제적인 원리라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치즘의 원리는 바로 극단적인 기회주의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디즘적인 광경과 다른 인류에 대한 우월감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감정적 만족은 적어도 한참 동안은 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빈곤하다는 사실을 보상할 수 있었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본질은 사디즘적 및 마조히즘적 충동의 동시적 존재로 설명되어 왔다. 사디즘이 타인에 대해 파괴성이 혼합된 절대적인 지배력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마조히즘은 자기를 강력한 힘에 종속시킴으로써 그 힘의 강인성과 영광에 참여하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디즘적 경향과 마조히즘적 경향 모두 고립된 개인이 자신의 무력함과 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공서적 관계를 바라는 욕구에 의한다.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사디즘적 인간이 자기 대상에게 의존하는 모양을, “사람은 가끔 심각하게 좌절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그는 다시 대중 앞으로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그 감정을 극복할 수 있다. 민중이야말로 우리 권력의 원천”이라고 하면서, 사디즘적 인간은 누군가에 대해 힘을 가지지 않은 한 얼마나 약하고 공허해지는지, 다른 사람을 향한 지배력이 얼마나 그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대중을 지배하는 권력에 대한 욕구는 엘리트들, 곧 나치 지도자들을 충동질한 요소이다. ‘지도자들’이란 우선적으로 권력을 누리는 인간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대중이라고 하여 결코 사디즘적 만족을 빼앗기고 있지만은 않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욕을 합리화하려고 했는데, 그 중요한 합리화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다른 나라 국민을 지배하는 것은 곧 그 나라 국민의 이익과 세계 문화의 번영을 위해서이며, 또한 권력욕은 영원한 자연의 법칙에 입각한 것으로서 자기는 오직 이 법칙에 따르고 있을 뿐이고, 그 자신은 보다 높은 힘의 명령 아래 행동하며, 또 그의 지배계획은 다른 민족이 그 또는 독일 국민을 지배하려고 하는 기도에 대한 단순 방위일 뿐이라고 하는 따위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사디즘을 ‘모든 지혜의 잔인한 여왕’인 자연에 투영하고 있으며, 자연의 보존법칙은 “필연성의 철칙 및 이 세계에서 가장 선량하고 가장 강한 사람이 승리의 권리를 가진다는 철칙에 결부되어 있다.”라고 주장했다.


  분명히 다윈의 이론 자체는 새도마조히즘적 성격이 가지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많은 지지자들에게, 인류가 보다 나은 문화의 단계로 진화한다는 희망에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에게서 그것은 그 자신의 사디즘의 표현인 동시에 정당화였다. 자신의 사디즘에 대한 마지막 합리화, 남의 공격에 대한 방위로서의 정당화는 히틀러의 저서에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그와 독일 국민은 항상 결백한 사람들이었으나 적은 사디즘적인 짐승이다. 이에 대한 많은 선전은 신중하고도 의식적인 거짓말로 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정신분석적 비난의 감정적 ‘진지함’이 있다. 이러한 비난은 항상 자기 자신의 사디즘이나 파괴성이 탄로 날 것을 방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히틀러에 의해 공산주의자는 야만이라고 비난되고, 마르크스주의의 승리는 그 정치적 의지와 행동적 야만성으로 귀결된다. 다른 나라에 대한 나치의 억압 행위는 한결같이 그들 나라의 압박에 대한 방위라는 설명과 함께 오히려 맹렬하게 비난되었다.


  새도마조히즘적 성격에서 나타나는 매우 전형적인 현상인 강자에 대한 사랑과 무력한 자에 대한 증오는 히틀러나 그 추종자들의 숱한 정치적 행동을 설명해 준다. 무력한 존재를 지배하는 힘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압도적으로 강한 힘에 복종하여 자기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려는 욕망이 존재한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실천인 이 마조히즘적 측면은 대중에게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권위주의적 성격으로서 두 경향,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얻으려는 절실한 희망과, 압도적으로 강한 외부의 힘에 복종하려고 하는 동경이 히틀러의 저서에서 볼 수 있다. 히틀러의 생각은 나치당의 이데올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그의 성격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의 성격은 열등감, 인생에 대한 혐오, 금욕주의, 인생을 향락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 같은 것 때문에 새도마조히즘적 충동의 토양이 되어 있다.


  중세의 파괴과정은 400년이 지난 근대에 이르러 완결되어 가고 있다. 전 산업조직 및 전 생산양식이 파괴되어 근대산업 이전의 수준으로 변화되는 일이 없는 한 인간은 주위 세계에서 완전히 해방된 개인으로 머물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인간은 소극적 자유를 견디다 못해 이미 포기한 일차적 억압 대신 새로운 억압으로 도피하려는 성향을 나타냈지만, 새로운 관계는 세계와의 참된 결합을 구성하지 않는다. 개인은 자아의 완전성을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안전성의 대가를 지불하지만, 권위와 인간 사이의 사실상의 분열은 사라지지 않는다.


  근대의 산업조직은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에 대해 경제적으로 보장된 삶을 위한 수단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노동시간의 단축과 동시에 인간의 지적 · 감각적 · 정서적인 잠재력을 살리기 위한 물질적 기초를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증대하는 개성화의 역사이며, 자유의 역사이다. 자유의 추구는 형이상학적인 힘이 아니므로, 자연의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개성화의 과정과 문화 성장의 필연적 결과이다. 권위주의적 조직은 자유의 추구를 촉진하는 근본적 조건을 제거할 수는 없으며, 또한 이러한 조건에서 비롯되는 자유의 추구를 근절시킬 수도 없다.    


제7장 자유와 민주주의    


제1절 개체성의 환상    


  우리는 어떠한 외적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고,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야말로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의 개체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또한 외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는 내부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가 자기의 개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성과가 된다.


  근대인에게 부여된 자유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논했을 때, 우리는 오늘날 개인의 고립감과 무력감을 증대시키는 경제적 조건들을 논했다. 이 과정의 심리적 결과를 논하는 가운데 이때의 무력감은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도피성을 취하거나, 또는 고립된 개인이 자동인형이 되어 자아를 상실함으로써 의식적으로는 자기는 자유로우며 오로지 자신에게만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의 강박적인 획일성에 이른다는 것을 말했다.


  직접적으로 억압되는 것은 적개심만이 아니며, 또한 거짓 감정을 거듭 표현함으로써 말살되는 것은 단순히 친밀감만은 아니다. 자발적인 감정이 광범하게 억압되어 거짓 감정으로 대치된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억압의 하나를 들어, 그의 사상체계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곧 성의 억압이다. 성적 쾌락의 부정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는 성적 억제의 경우나, 성이 강제적인 성질을 가지게 되어 특별한 맛이 없는데도 자기 자신을 잊게 하는 술이나 마약과 같이 그것이 낭비될 경우에 분명해진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이건 상관없이, 성적 욕구는 강렬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억압은 단지 성적인 영역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표현하려는 인간의 용기를 약화시킨다.


  우리 시대는 죽음을 쉽게 부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근본적인 한 측면을 부정하고 있다. 죽음과 고통에 대한 자각이 삶의 가장 강력한 자극의 하나가 되고 인류 연대성의 기초가 되며, 또한 그것 없이는 환희나 열정이 그 강도와 깊이를 더할 수 없는 그러한 경험이 되도록 하는 대신 개인은 그 인식에 대한 억제를 강요받고 있다.


  어린아이의 독창적인 사고를 위축시키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는, 사실에 대한 지식의 강조, 정보의 강조이다. 보다 많은 사실을 알면 알수록 실제의 지식에 보다 확실하게 도달한다는 슬픈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둘째는, 모든 진리를 상대적으로 간주하는 일이다. 이러한 상대론의 결과로, 사고가 본질적인 자극을 상실하고, 그 대신 ‘사실들’을 기록하는 기계가 된다. 실제로 사고일반이 물질적 삶의 지배를 희구하는 요구에서 비롯되어 발달해 온 것처럼, 진리의 탐구도 개인 또는 사회 집단의 관심이나 요구에 뿌리박고 있다. 모든 인간 존재 속에 진리를 희구하는 욕구가 있는 것은 모든 인간 존재가 진리에 대해 어떤 요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구조화된 세계의 모든 이미지를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이 듣고 있는 일에 순수하게 관계할 수 없게 된다. ‘자유’의 명목 아래 인간의 삶은 모든 구조를 잃는다. 감정과 사고에서의 ‘독창성’ 결여에 관한 언급은 ‘의지적’ 행위에도 해당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의 전제, 즉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근대인은 ‘자신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때는 커다란 위험마저도 무릅쓴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에 대해 스스로의 목표를 부여하는 위험과 책임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여 이를 행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공연한 낡은 형태의 권위에서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새로운 권위의 희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을 가진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 사는 자동인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순수한 관계를 상실한, 사람이건 물건이건 모두 도구화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만든 기계의 한 부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순수한 안정의 기초가 되어야 할 자아를 상실해 버린다. 자아 상실의 결과 순응의 필요가 증대했다.


  오늘날 우리는 당연한 일로서 우리는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에 대한 회의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증대하기까지 했다. 근대인은 삶에 굶주려 있으나, 자동인형이 되었으므로 자발적인 활동이란 면에서 삶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래서 대용품으로서 어떤 종류의 흥분이나 전율이라도 취하게 된다. 


  그렇다면 근대인에게 자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근대인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만일 자기가 바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알기만 하면, 자기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익명의 권위에 협조하여 자기의 것이 아닌 자기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 무력함을 느끼며, 그 결과 더욱 순응을 강요당한다. 낙천주의와 창의의 겉치레에도 불구하고, 근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압도되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마치 마비된 것처럼 다가오는 파국을 바라보고만 있다. 인간의 자동인형화가 가져오는 절망은 파시즘의 정치적 목적을 육성하는 풍요한 토양이다.    


제2절 자유와 자발성    


  이 책은 지금까지 자유의 한 측면, 지난날 삶에 의미와 안정을 부여했던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 근대 사회의 고립된 개인의 무력함과 불안함만을 다루어 왔다. 우리는 개인이 이러한 고립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고립된 존재로서 개인은 외부 세계와 비교해 철저하게 무력하며, 따라서 외부 세계를 몹시 두려워한다. 또한 고립감 때문에 그에 대한 세계의 완전성은 깨지고, 그 역시 지향해 나갈 방향을 상실한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이나 삶의 의미, 마침내는 자신의 행동을 이끌 수 있는 모든 원리에 대한 회의에 짓눌리고 만다. 무력함도 회의도 다 같이 삶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살기 위해 자유, 즉 소극적인 자유로부터 도피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새로운 속박 안으로 몰려 들어간다. 이러한 속박은 권위나 사회 집단에 의해 지배되지만,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닌 일차적인 속박과는 다르다. 도피는 그의 상실된 안정을 회복시키지는 않고 다만 분열된 존재로서의 자아를 망각하는 것을 도와줄 뿐이다. 인간은 개인적 자아의 완전성을 희생시켜 결국 또 하나의 유약한 안정을 찾아내며, 고립감을 견디다 못해 자아를 상실하는 길을 택한다. 이렇듯 자유(……으로부터의 자유)는 인간을 새로운 속박으로 이끌어간다.


  이 분석이, 자유로부터 새로운 의존으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자유의 순환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유용한가? 모든 일차적인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개인을 몹시 고립시킴으로써 그는 새로운 속박으로 도피해야만 하는가? 독립과 자유는 고립감, 그리고 공포와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개인이 독립적인 자아로서 존재하면서도 고립되지 않고 세계나 타인, 자연과 새로이 이어지는 적극적인 자유는 있는가?


  우리는 긍정적인 해답이 있다고 믿는다.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악순환이지만은 않다는 것, 사람은 자유로우면서도 고립되지 않고, 비판적이면서도 회의적이지 않고, 독립적이면서도 인류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자유는 자아를 실현하여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


  우리는 자아의 실현은 단순히 사고의 행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성격 전체의 실현, 그의 감정적 · 지적인 여러 능력의 적극적인 표현으로 성취된다고 믿는다. 모든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성격의 자발적인 행위 속에 존재한다. 자발적인 행위는 개인의 고립감이나 무력감에 의해 강요당하는 강박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외부에서 시사되는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하는 자동인형의 행위도 아니다. 자발적인 활동은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이며, 심리적으로는 라틴어 어원(sponte) 그대로의 뜻, ‘자신의 자유의지’를 의미한다. 우리 대부분은 적어도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자발성을 인정할 수 있는데, 그 순간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순간이다. 


  자발적인 활동이 어째서 자유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앞서 소극적인 자유 그것만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킨다는 것, 개인과 세계와의 관계는 멀고 신뢰할 수 없어진다는 것, 그들의 자아는 약화되어 줄곧 위협받는다고 했다. 자발적인 활동은 인간의 동일성을 희생하지 않고 고립감의 공포를 극복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아의 자발적인 실현에서 그 자신을 새롭게 외부 세계와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와 같은 자발성을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요소이다. 일은 또 다른 구성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립감을 피하기 위한 강박적인 활동으로서의 일이 아니다. 창조적 행위에서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다. 사랑과 일에 관해 진실인 것은, 그것이 관능적 쾌락의 실현이거나 공동체의 정치적 생활에의 참여이건 간에 모든 자발적인 행동에도 진실이다. 그것은 자아의 개체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자아를 인간이나 자연에 결합시킨다. 


  모든 자발적인 행위를 통하여 개인은 세계를 품에 안는다. 우리의 창조적인 자발적인 활동에 의해 생기는 이러한 성질만이 자아에 힘을 주고, 나아가서는 자아 완전성의 기초가 된다. 우리가 깨닫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자기가 자기 아닌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자신의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만일 개인이 자기 자신 또는 삶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극복한다면, 그리고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외부 세계를 포용하는 것과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는 개인으로서 힘을 획득하여 안정을 얻는다. 이 안정은 외부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가 일차적 속박이 되듯이 전(前) 개인적 단계에서의 특정적인 안정과는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 자발적인 활동으로 순간마다 획득되는 안정이다. 그것은 자유만이 줄 수 있는 안정이며, 환상이 필요한 조건을 배제하기 때문에 환상은 전혀 필요하지 않은 안정이다.


  자아실현으로서의 적극적인 자유는 개인의 독자성을 충분히 긍정한다. 자아의 독자성은 결코 평등의 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평등의 개념은 모든 인간이 비슷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평등 개념은 오늘날 개인이 그 경제적 활동에서 행하는 역할에서 유래된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격의 구체적인 차이는 배제되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단 하나만이 중요하다. 즉, 전자가 파는 것을 가지고 있고 후자가 살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생활에서 인간의 차별은 없다. 현실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하며, 그 독자성을 배양하는 것이 개체성의 본질이다.


  적극적인 자유는 하나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즉, 독자적인 개인의 자아보다 더 높은 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의 삶의 중심이며 목적이라는 것, 또 개체성의 성장과 실현은 목적 그 자체로서, 설사 보다 큰 존엄을 가지는 것같이 여겨지는 목표에도 결코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보다 높은 어떤 것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상의 존엄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상을 가장 강하게 긍정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상이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이상과 거짓된 이상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모든 참된 이상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개인의 성장과 행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바람직한 것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마조히즘 현상에서는 고통이나 복종을 체험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역학적인 심리학에 의해, 쾌락의 주관적 경험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면에서 보면 어떤 행위의 가치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분석에 의해 쾌락감은 병리학적인 도착의 결과로, 경험의 객관적인 의미에 관해서는 거의 실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된 이상이란 자아의 성장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촉진하는 목표이며, 거짓된 이상이란 주관적으로는 매혹적인 경험이면서도 실제로는 삶에 유해한 강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목표라고 정의하기에 이른다. 일단 이와 같은 정의를 인정해 버리면, 참된 이상이란 개인보다 우월한 어떤 가면을 쓴 힘이 아니라, 자아의 철저한 긍정의 분명한 표현이 된다. 이러한 긍정과 대조적인 이상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이함으로써 이상이 아니라 병적인 목표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이제 희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자유란 보다 높은 어떠한 힘에도 복종하지 않는 것이지만, 이것이 삶의 희생까지도 포함한 희생이라는 사실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인가? 파시즘에서의 희생은 인간이 자아를 확보하기 위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최고의 대가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조히즘적 희생은 삶의 달성을 바로 삶의 부정, 자아의 소멸 속에서 찾는 것이다. 


  만일 개인이 자발성의 의미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 허락된다면, 그리고 그들이 자기 자신보다 높은 권위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정부 상태란 피할 수 없는 결과일 것인가? 무정부 상태가, 개인이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의 차이에 대한 언급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합리적 원위는 개인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목표를 나타낸다.


  근대인은 전통적 권위에서 해방되어 ‘개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고립되고 무력해졌으며, 자기 자신이나 타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외재적인 목적의 도구가 되었다. 적극적인 자유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능력을 포함하여 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잠재력의 완전한 실현과도 일치한다. 자유는 그 자체의 역동성의 논리에 따라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전환될 우려가 있는 위험한 지점에 이르렀다. 


  자유의 승리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이 문화의 목표인 동시에 목적인 사회, 삶이 성공이나 그 밖의 어떠한 것으로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사회, 개인이 국가 또는 경제기구와 같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힘에도 종속되지 않고 조종되지 않는 사회, 마지막으로 개인의 양심이나 이상이 외부 요구의 내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것이며 그의 자아의 특성에서 생겨나는 목표를 표현하는 그런 사회로 발달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국가 전체가 경제적 · 사회적인 힘을 합리적으로 지배하는 계획경제에서만 개인은 일 속에서 책임감과 함께 창조적인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의 조종을 능동적이고 지적인 협동으로 대치하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원리를 형식적인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경제적 영역으로 발전시키고 확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완전한 발전에 공헌하는 경제적 · 정치적 조건들을 창조해 내는 조직인 데 반해, 파시즘은 어떠한 명목에서이건 개인을 외적인 목적에 종속시켜 순수한 개체성의 발전을 약화시키는 조직이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큰 난관의 하나가 계획경제와 각 개인의 적극적인 협동과의 모순 속에 있음은 분명하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계획이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참여와 융합하지 않는 한, 그리고 사회적인 삶의 흐름이 아래로부터 위로 끊임없이 흐르지 않는 한 계획경제는 다시 민중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조종으로 바뀔 것이다. 집중과 분산의 결합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회의 중심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한 승리는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고 공격태세를 취하여, 지난날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품었던 것과 같은 목표를 현실화하는 데까지 전진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간 정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신념, 삶과 진리에 대한 신념 및 개인적 자아의 적극적이며 산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을 수 있을 때에만 니힐리즘의 힘을 이겨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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