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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Apr 23. 2018

자전거 여행

글 김훈 · 사진 이강빈.  생각의 나무 펴냄. 2000년.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소개한 글을 보고 매력을 느껴 책을 잡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은 풍광 견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책 속에서도 같은 의미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한 문장씩 만날 때마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소박한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와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스며든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무언가 알 수 없는 평온함이 가슴에 남는다. 해거름 어슴푸레 지는 햇살 사이로 초가지붕의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동네, 나그네 발길에 동네 강아지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저자의 통찰과 혜안을 통해 바라본 한 시점에 정지하여 읽는 이의 마음에 비집고 들어온다. 과거 역사 속의 인물들이 살아와 말을 하고 미래의 지평을 연다. 저자의 통찰은 단순하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자전거로 조국의 산하를 누비며 경험한 일들이 저자의 독특한 통찰을 통해 감칠맛 나는 삶의 모습이 되어 살갑게 다가온다. 부딪히는 바람과 물, 산과 들이 저자의 눈을 통과하며 어느새 가까운 친구처럼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콘크리트 문명의 숲에서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숨 막힐 것 같은 삭막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저자의 두 바퀴 순례 길의 행보는 시원의 자연과 어우러져 느림의 미학과 천연스러운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먼 옛날 풀숲의 개똥벌레를 좇아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천진한 소리를 듣는 것처럼 정겹고 소박한 언어를 만난다.    


   책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한 단락을 볼지라도 전체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득한 신화의 시절부터 산은 물리적 고지일뿐 아니라 관념적 자연이었다. 산은 높고 깊고 멀고 험해서, 그 시원성은 훼손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의 원형인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현세의 질곡 속에서 끝없이 배반당하는 인간의 모든 꿈은 산에 의탁되었는데, 배반당한 꿈들이 빚어내는 관념의 산은 인간의 원근법에 따라서 멀거나 가깝다.

   도가의 산은 멀고 또 높아서, 그 봉우리들은 바람이 밀고 가는 안개와 구름에 가려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은 끊어져 있어 자전거를 굴려서 갈 수가 없다.

   유가의 산은 인간의 마을에 가깝다. 퇴계의 등산 코스인 청량산과 소백산은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해주는 도덕적 소생력으로서만 아름다울 수가 있었다. 퇴계의 산은 인간의 마을이 이루어내야 할 꿈의 원형이었으며, 그 산은 마을에 이르는 정확한 하산로를 갖는 산이었다. 그는 은둔과 적멸로서의 산을 부정했고, 산에 가서 계곡 물을 퍼먹고 구름과 안개를 마시며 살려는 자들을 경멸했다. 그러므로 한산자(당나라의 전설적인 거렁뱅이 시인)는 길 없는 산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이 아름답고 퇴계는 길 있는 마을로 내려오는 앞모습이 아름답다. 동양의 산들은 거기에 의탁된 마음의 힘으로 높거나 깊어서, 산은 때때로 교조적이었다.

   잎 지는 태백산맥은 한산자의 산도 퇴계의 산도 아닌 듯싶었다. 그 큰 산맥에 내리는 가을의 빛은 사람들이 거기에 투사했던 원근법의 그물코 사이를 빠져나오면서, 무진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산은 붉게 물드는 산이 아니라, 여름의 비린내가 물러가는 자리에서 제 본래의 빛깔로 돌아오는 산이었고, 사람들의 마음의 길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빛나는 산이었으며, 새롭게 부활하는 빛들을 땅속 가장 깊은 곳에 묻으며 이제 흰 눈에 뒤덮일 산이었는데, 길이 끊겨서 갈 수 없는 저편 벼랑 아래 떨어진 빛의 부스러기를 강운구의 카메라는 조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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