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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Apr 24. 2018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글 알랭 드 보통 · 정영목 옮김. 도서출판 청미래. 2002년.

  1969년생 알랭 드 보통이 20대 때에 쓴 책이다. 20대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나이에 이런 통찰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생각의 깊이에서도 그러하지만, 글을 풀어내는 재주 역시 놀라운 통찰력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브리티시 항공 보잉 767기에서 만날 최종 확률 989.727분의 1이라는 계산을 넘어 클로이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함께 하며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을 평범한 일상들을 범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쓴 통찰의 기록이다. 글의 내용을 따라가 보며 글의 깊이를 음미해보자.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는 삶의 우연적 성격을 목적성이라는 베일 뒤로 감춘다. 우연과 필연의 경계는 어디일까?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가.


   확실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구애라는 땅에 들어가 얼쩡거리지 말아야 한다. 그 땅에서는 모든 웃음과 모든 언어가 만 이천 가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열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섹스는 본능적이고, 반성하지 않으며, 자연발생적이다. 이에 반해 생각은 신중하고, 말려들지 않으려 하고, 판단하려고 한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 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사랑의 이론가들은 융합을 의심해 왔는데, 그것은 정당하다. 사람들은 차이를 따지는 것보다는 유사성을 부여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절대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맑은 눈으로 물의 깊이와 성질을 완전히 조사할 때까지는 도약을 유보한다.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이 자라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왜곡된 사랑의 현실에서는 아는 것이 늘어날 경우, 그것은 유인이 아니라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클로이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울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지겹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사랑의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철학의 역사는 현상과 실재 사이의 차이에 냉혹한 관심을 가져왔다. 철학자는 중얼거린다. “나는 밖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망막 뒤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착각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철학자는 기대감으로 마음을 졸이면서 중얼거린다. “나는 아내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시각적 착각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좇는 일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왜 그것을 아쉬워할까?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비록 잠시라고 해도 우리에게 심각한 행복을 안겨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하여 얻은 행복, 이성적으로 노력해서 어떤 일들을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행복은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내가 클로이와 함께 얻은 행복은 깊은 철학적 숙고 뒤에 나온 것도 아니고 개인적 성취의 결과도 아니었다. 단지 신의 기적적 개입에 의하여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귀중한 사람을 찾아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그런 행복은 위험했다. 자족적인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불안은 부분적으로는 내 행복의 원인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써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일단 그런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이 대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자만과 우울 사이에서 위험하게,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랑은 첫눈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빠른 속도로 죽지는 않는다. 


   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무엇인가 비참한 일이 일어날 때면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벌을 받는 것인지 이해하려고 일상적인 인과론적인 설명을 찾게 된다.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아니면 마냥 행복한 표적으로 실수를 무한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는 방법을 알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사는 것도 자전거 타기나 피아노 연주하기처럼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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